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 (1067) 문장보국(文章報國)

- 문장으로 나라에 보답한다.

기사입력 : 2025-02-25 07:58:05
동방한학연구원장

1910년 일본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자 우리나라의 모든 국민이 불행을 겪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선비들의 불행은 더욱 비참했다.

선비 가운데는 의병(義兵) 활동이나 독립운동하신 분, 울분에 못 이겨 절의를 지켜 자결하신 분 등이 있는데, 이런 두 가지 경우 칭송도 받는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면서 다음 시대를 위해 교육에 전념하는 선비도 있었다. 이런 분들은 마치 비겁한 사람인 것처럼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 협조한 자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은 반역자 낙인이 찍혀 두고두고 매도된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혹은 침략자의 노예가 되기 싫어 해외로 망명을 많이 했다. 주로 중국에 가서 무장투쟁도 하고 임시정부도 수립하여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름 없이 망명하여 자기 역할을 다한 분들도 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조선 말기의 4대 문장가, 4대 시인, 역사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 1850~1927) 선생이다.

1905년 9월에 ‘섬 오랑캐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1882년 서울에 와 있던 중국 청년 지식인 장건(張건)을 알았는데, 23년 뒤 그에게 중국으로 가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답장을 받기 전에 상해에 도착해서 장건을 찾았는데, 다행히 만났다.

장건은 장원급제한 뒤 잠깐 관직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고향 남통에 돌아와 대사업가가 되었다. 창강에게 자기가 남통에 차린 출판사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의 편집을 맡겨 생활을 하도록 했다.

창강은 여기서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문장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문집, 최고의 시인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시집, 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 문집 등 22종의 중요한 서적을 편집 출판하고 국내에 배포하여 민족혼(民族魂)을 살려 나갔다. 또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를 교정하고,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高麗史)’의 오류를 지적하여 간행하였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망해도 민족혼이 있으면 나라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창강은 굳게 믿고, 민족혼을 살려 나갈 수 있는 일을 계속했다. 스스로 “문장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리라[文章報國恩]”라고 다짐했다.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중국에 계속 알렸다.

창강은 중국에서 대학자 유월(兪 ), 양계초(梁啓超), 북경대학 초대 총장이자 서양 학술서적을 100종 이상 번역한 엄복(嚴復) 등과 학술적 교류를 하며 우리나라의 전통 학문을 중국에 알렸다.

1927년 그의 장례식에 중국 지식인 200여 명이 모였다 하니, 중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 文 : 글월 문. * 章 : 문장 장.

* 報 : 보답할 보. * 國 : 나라 국.

허권수 동방한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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