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경남 독립의 역사와 더 큰 미래로] ② 김해만세운동 주도한 김성도 선생
「독립만세」청년의 외침, 105년 만에 빛을 보다
진영장터서 독립 외치다 옥고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
김성도·감태순·노오용·손치봉·장준식·최석용 선생은 100년 넘게 잊혀 왔다. 이들은 2024년이 되어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경남 출신인 이들은 도내 여러 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지만, 그간 자료 부족 등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경남도가 이들의 행적을 발굴해 공적을 인정받음으로써 마침내 독립유공자가 됐다. 잊힐 뻔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새롭게 서훈된 것에 비해 이들에 대한 발자취나 기념시설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이들의 묘비조차 없어 제대로 추모할 수 있는 공간도 없는 상황이다. 경남신문은 100여 년 전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경남의 독립 역사를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
106년 전 시위 펼쳤던 진영상설시장 한쪽에 기념비, 만세길 벽화엔 빛바랜 사진만…

김해시 진영읍 만세길 골목 입구에 부착된 진영리 만세시위 애국지사들 사진. 왼쪽부터 김정태, 김용환, 김우현, 김성도 선생으로 추정된다./성승건 기자/
◇20대 청년들, 김해에서 독립을 외치다= 1919년 3월 31일. 김해군 하계면 진영리(현 김해시 진영읍) 장터는 장날을 맞아 이른 아침부터 장꾼들이 모여들었다. 장꾼들로 북적이던 오후 1시께 어디선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성도(당시 26세)와 김우현, 김정태, 김용환 선생 등 20대 청년들의 외침이었다.
김성도 선생은 이틀 전인 29일 진영리에서 동지들과 돈을 모아 태극기와 깃발을 제작하며, 시위를 준비했다. 거사 당일, 그는 큰 태극기를 대나무에 묶어 이를 앞세웠다. 김우현 선생은 천으로 만든 태극기를 흔들었다. 김정태·김용환 선생은 군중에게 종이로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라고 쓴 전단을 뿌렸다.
이들이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자 많은 군중이 따라 부르짖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헌병들이 주동 인물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크게 확대되진 못했다.
진영리는 일찍부터 일본인들의 경제적 침략을 받아 이곳 농민들의 항일의식은 어느 곳보다 높았다. 1919년 3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전국적 만세운동에 이곳의 주민들도 호응했고, 김성도 선생을 비롯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진영 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진영 만세운동은 3월 31일뿐만 아니라 4월 3일과 5일에도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그해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김성도 선생 등 4명의 진영 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서류./경남도/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년 5월 19일)에서 김성도 선생이 1919년 3월 김해군에서 동지들과 돈을 모으고 태극기와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한 후 3월 31일 진영시장 장날을 기회로 만세 시위를 주동한 내용이 확인됐다./국가보훈부/
◇100년이 넘어서야 되찾은 명예= 이후 105년 만인 지난해 11월 김성도 선생은 3·1운동 분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은 스스로 기록을 숨겨야 했고,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이 지워지거나 축소, 왜곡됐기 때문에 포상 신청에 필요한 공적내용과 거증자료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서훈을 받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진영리 만세시위’가 벌어졌던 김해시 진영읍 바람개비 야시장 입구./성승건 기자/
◇상설시장 한쪽에 놓인 기념비…벽화엔 선생으로 추정되는 흐릿한 사진만= 최근 김성도 선생이 106년 전 만세운동을 벌였던 김해시 진영읍 진영상설시장을 찾았다. 옛 진영장터였던 이 일대는 바람개비 야시장이 들어서 특정 기간에는 다양한 먹거리와 문화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거리로 조성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여기가 만세운동이 벌어진 곳이 맞아요. 만세운동 행사도 하고요. 김성도 선생이요? 잘 모르겠는데, 저 쪽으로 가보세요.” 주민 정종수(60·진영읍)씨는 상설시장 한쪽에 있는 한 표지석을 가리켰다. ‘김해 진영읍 기미년 독립만세의거 기념비’라고 적힌 표지석은 가로 80㎝, 세로 90㎝, 높이 150㎝의 규모로 기미년 독립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31일 세워졌다. 기념비 전문에는 김성도를 포함한 7명의 이름과 서훈일자, 당시 연령, 직업, 형량 등과 함께 간략한 공적이 새겨져 있었다.

바람개비 야시장 입구에 위치한 ‘김해 진영읍 기미년 독립만세의거 기념비’./성승건 기자/
김성도 선생에 대해서는 기념비 설립 당시 기준으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라고 명시돼 있다.
기념비 인근 한 건어물 가게 사장 최모(74·진영읍)씨는 “김성도 선생이 서훈을 받은 건 몰랐다”면서도 “김해에 있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할 거 없이 기념비를 보려고 견학을 와서 다 읽고 간다”고 했다.
발길을 옮겨 200여m 떨어진 진영전통시장으로 향했다. 김해시가 조성한 ‘진영인 골목길’에서 김성도 선생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진영인 골목길은 진영전통시장 일원 골목골목에 지난 2022년 조성됐다.
시는 옛 시가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마다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을 테마로 꾸몄다. 1구간은 대통령길, 2구간은 상록수길, 3구간은 만세길, 4구간은 코주부길, 5구간은 우리마을 사람길이다.

만세길 골목 담벼락에 ‘진영리 만세시위’를 묘사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성승건 기자/
김성도 선생의 사진이 있다는 만세길을 찾아 골목을 누볐다. 하지만 안내하는 표지가 없어 전통시장 상인에게 물어 물어 만세길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만세길 골목에 들어서자 멀리서 청년 4명의 사진이 흐릿하게 보였다. 담벼락에 부착된 사진 아래에는 ‘김해군 하계면 진영리 만세시위 애국지사’라는 문구와 함께 1차 의거와 2차 의거에 참여한 애국지사 8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진을 찍어 인근 상인들에게 이들 중 누가 김성도 선생인지 아느냐고 물었지만, 알지 못했다. 김해시는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부터 김정태, 김용환, 김우현, 김성도 선생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인터뷰/ 김정태 독립운동가 손자 김광호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모든 독립운동은 재조명돼야 하고 후손들 삶에도 관심 가져야 ”

김광호 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김해3.1독립운동기념사업회/
김광호 회장의 조부는 김성도 선생과 함께 진영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정태 선생이다. 김정태 선생은 1919년 진영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조부 김정태 선생과 함께 진영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성도 선생이 105년 만에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김성도 선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부나 아버지에게서 들으신 적이 있는지.
△ 일단 기쁘다. 저희 김해독립기념사업회는 김성도 선생의 서훈을 위해 후손을 찾으려 애썼는데, 찾지 못해 실망을 많이 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당시 네 분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분은 아니었다고 한다. 직업도 나이가 각각 다른데 어떻게 의기투합이 됐는지 의아하다고 하셨다. 김우현 선생이 당시 하계면 면서기로 근무했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나오는 정보를 많이 아니까 주도를 하지 않았겠느냐 추정하셨다.
-진영 만세운동만의 특징이 있다면.
△ 당시 만세운동은 비폭력 만세운동이었다. 네 분은 진영 사람들한테 우리 동포를 수탈하는 일본의 악랄함을 알려야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날에 맞춰서 해야 하는데, 만약 불상사가 일어나면 주민들이 다칠 수 있으니 비폭력 만세운동을 했다. 그래서 일본 헌병, 경찰들이 왔을 때 순순히 잡혔다고 했다. 또 의로운 기생 ‘의기’들이 만세운동의 공로자였다는 점이다. 3월 31일에 사용한 태극기와 만장 등을 기생들이 자진해서 치마 속에 숨겨 장터까지 옮겼다고 한다. 조부님이 아버지께 말하길 진영 만세운동은 기생들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라더라. 그래서 지금도 이름 없는 의로운 기녀라고 해서 무명 의기의 위패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아직 경남지역에 미서훈 독립운동가가 17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정부와 경남도에서는 이들을 발굴하고 있다.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독립운동은 정치적 상황이 배제된 순수한 민족 운동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도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 당시 친일파의 후손들이 정계, 법조계에 포진돼 있다. 당시 독립운동하셨던 분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가난하게 정부에서 주는 몇 푼의 연금으로 살고 있다. 우리는 광복 80주년이라는 데 연연해서는 안 된다. 79주년이든 82주년이든 관계없이 모든 독립운동은 재조명돼야 하고 후손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정부기관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더 기울이고 협조를 해줬으면 한다.
김태형 기자 thkim@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