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경남 독립의 역사와 더 큰 미래로] ③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주도한 감태순 선생
잘못 새겨진 역사, 바로 새겨야 할 진실
평범한 농민으로 산 30세 청년
1919년 3월 23일 창원읍 장날
7000명 시민 앞에서 독립 선언
‘시위 참여 이유’ 5월 옥고 치러
‘출소 후 삶’ 알려진 바 없고
1951년 5월 사망 기록이 전부
창원읍민만인운동비 안내판엔
잘못 새긴 이름만 덩그러니
기록 증언할 기념사업회 없어
창원시 “이름 오류 수정할 것”
경남보훈지청 “손녀 생존 확인
감태순 선생 유족 등록 진행 중”
일제강점기 시절 창원에서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독립을 위해 항거했다. 대표적으로 △3·23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4·3 삼진연합대의거 △4·3 웅동독립만세운동 등이 있다.
이 중 3·23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3일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시위로 수천 명이 모여 독립을 외쳤다. 하지만 현재 마땅한 기념사업회가 없어 시민들에게 잊힌 현실이다. 이 중 시위를 주도해 옥고를 치른 감태순(甘泰舜) 선생은 지난해에야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념비가 없고, 독립운동 이후 삶은 기록되지 않아 재조명이 힘든 상황이다. 100여 년 전 목숨 걸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실제 현장에서도 그들의 발자취를 알아가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 세워져 있는 창원읍민만인운동비 안내판에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감태순 선생을 ‘김태순’으로 잘못 표기해 놓았다./김승권 기자/
◇수천 명 모여 독립 외쳤다=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1919년 3월 23일 창원군 창원읍(창원시 소답동) 장날 감태순 선생은 수많은 인파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위 취지를 대중들 앞에 설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호응해 태극기를 들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시위는 4시간여 만에 군경의 진압 끝에 마치게 됐지만, 6000~7000여명의 시민이 모인 대규모 시위였다는 데 의미가 크다.
시위가 고조되자 경찰과 헌병이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 규모가 워낙 커 인근 마산과 진해의 일본군도 출동했다. 이날 일본 경찰과 군은 무차별로 진압을 시작해 시위 참가자 31명을 체포했다. 감태순 선생도 이날 체포됐다.
이날 체포되지 않은 몇 명의 주동자들은 다시 4월 2일 2차 시위를 진행했다. 일본 헌병은 총검으로 시위 참가자들을 구타했고, 일반 시민들은 이를 보고 더욱 분노했다. 시위는 1차 때보다 규모가 컸고 매우 격렬했다. 일본 기록에도 당시 시위를 “열광적 소요가 야기됐다. 겨우 해산시켰다”라고 기록됐을 정도이다.
1919년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를 거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시위는 대도시에서 농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고 시위 참가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 탄압이 시작됐음에도 4월 전국적으로 확대됐고, 중국과 미국 등 해외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1919년 5월 29일 자 매일신보에 감태순 선생 등이 1년 이하 징역형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기사.
3월 23일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뿐만 아니라 마산 추산동(3월 10일), 구마산 장터(3월 21일), 창원 상남면(4월 29일) 등 두 달 동안 총 15회 만세 시위가 있었다. 시위에 참여한 20여명이 구금됐고, 가혹한 고문과 심문을 받아 재판에 회부됐다. 이 중 12명이 마산과 대구의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감태순 선생도 이 과정에서 연행되어 1919년 5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불복해 항소했지만, 징역 6개월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그의 삶은 기록되지 않았다. 감태순 선생은 만세운동 참여 당시 평범한 30대 농민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51년 5월 사망한 게 그가 독립운동 이후 남긴 기록의 전부이다.

감태순 선생 등의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1919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서류./경남도/
◇잘못된 기념비, 제대로 역사 기록 못해= 7000여명이 참여했을 만큼 대규모 만세 시위였지만, 이를 기념할 수 있는 건 작은 비석뿐이었다. 지난 11일 오전 찾은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이곳에는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85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었다. 비석에는 100여년 전 그날의 뜨거운 함성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었다.

1919년 3월 23일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해 세운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두럭어린이공원의 창원읍민만인운동비./김승권 기자/
다만 2017년 세워진 안내판에는 오류가 보였다. 안내판에는 감태순 선생을 ‘김태순’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었다. 현재 김태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공자는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하동 출신 미서훈 독립운동가 김태순 선생이 존재한다. 국가보훈부가 2003년 발표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자료에 김태순 선생이 존재하지만, 그는 1905년생이라 창원읍민만세운동 주동자들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감태순 선생은 1889년생이다.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은 큰 규모에 비해 마땅한 기념사업회가 없어 지역 주민들에 잊히고 있는 현실이다. 기념비가 세워진 공원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30년 넘게 이 근처에서 살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기념비를 보고 이곳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은 알지만, 누가 주도했는지 등 자세한 내막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경남동부보훈지청 관계자는 “안내판을 제작한 건 창원시라 현재 확인하고 있지만, 공훈 사료, 전산상에도 김태순 선생이란 이름은 없다. 현재로서는 잘못 게재된 게 맞는 것 같다”며 “지난해 유공자 포상 후 손녀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돼 유족 등록 절차 중이다. 손녀가 감태순 선생에 대해 기억해 증언하면 좋겠지만, 현재로서 그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창원시도 오류를 인정하고 안내판을 수정하겠다고 밝혔다.
〈인터뷰〉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 주관 조현근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 사무국장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묘소·유족 찾아 재조명해야”

조현근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 사무국장/본인 제공/
조현근 국장은 2019년부터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주관해 왔다. 이전에는 이 같은 행사가 없었기에 제대로 된 선양 활동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를 만나 잊혀 온 지역의 크고 작은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들어봤다.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의의는 무엇인지.
△두 차례에 걸쳐 수천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창원읍 지역뿐만 아니라 마산, 북면, 상남에서도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였다. 한 차례 무력 진압이 있었음에도 같은 장소에서 다시 시위가 열린 것은 당시 일반 시민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볼 수 있어 의미가 크다.
-감태순 선생 경우 출소 후 행적이 불분명하다. 이 같은 사례가 많을 것 같은데.
△여러 가지 이유로 유족들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립 유공자의 묘소도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외에는 출소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기록이 없어 이들을 재조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대대적인 묘소나 유족 찾기 운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 같이 기념사업회가 없어 잊힌 독립운동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움직임이 필요한가.
△2018년까지는 창원읍민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행사가 거의 없었다. 100주년을 맞아 선양사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뜻을 모아 2019년부터 창원시 등과 재현 행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퍼지면서 중단돼 지역 주민들한테 많이 잊힌 것 같아 아쉽다.
읍민만세운동을 기억하는 건 소답동 작은 공원의 비석이 전부이다. 창원시에 이 비석이라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개된 장소로 옮기자고 제안했지만, 예산 때문에 힘들다는 답변이 왔다. 기념사업회가 없는 지역의 독립운동들이 많다. 각 동, 읍, 면에 조직된 주민자치위가 나서서 선양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역사는 많이 잊혀 왔으니, 기관에서 정리해 기념할 필요도 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