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경남 독립의 역사와 더 큰 미래로] ④ 사라진 흔적, 잊혀가는 역사
만세 함성 가득했던 ‘밀양 태룡리 장터’ 사라지고 밭과 우사만…
1919년 만세운동 펼쳤던 장터 찾았지만
1959년 태풍에 역사 흔적 온데간데없고
주변 마을 주민들 기억에서도 잊혀져
2.4㎞ 떨어진 단장면 행정복지센터에
‘만세운동비’ 세워 역사적 가치 보존
실제 현장과 멀어 옮길 필요성 제기도
의령·함양·밀양 등서 독립 외쳤던
손치봉·노오용·최석룡·장준식 선생
만세운동 105년 만에 대통령 표창
경남도는 2023년 6월부터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 작업은 입증 자료 부족 등으로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지난해에는 경남 출신 3·1운동 분야 독립운동가 6명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뒀다. 도는 지난 2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해도 독립운동가 발굴에 집중할 계획이다. 하지만 3·1절을 앞두고 본지가 찾은 역사의 현장에는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한 기념 공간과 역사적 기념물이 부실하거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작업만큼, 이들의 희생을 알리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1919년 4월4일 밀양 태룡장터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태룡장터는 현재 단장천 옆으로 우사와 비닐하우스 등이 자리잡고 있다./김승권 기자/
◇곳곳에서 울려 퍼진 독립 만세= 합천군 초계리에서 태어난 손치봉 선생은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세를 외쳤다. 당시 21세였던 손치봉 선생은 대구 계성학교 재학 중, 여러 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대구헌병분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됐고, 손치봉 선생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세운동의 함성은 충의의 고장 의령에서도 울려 퍼졌다. 일본군 조선헌병대 사령부가 작성한 ‘1919년 조선소요사건상황’ 기록에 따르면 ‘3월 14일 의령 읍내에서 공립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중 2000명이 경찰서로 밀려오기를 하루에 세 번이나 했고, 다음 날 15일에도 읍내에서 3차례 시위가 있었고, 부림면 신반에서도 시위운동이 있었다.’

손치봉 선생 등의 대구 서문시장 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거증 자료./경남도/
이날 의령읍내 장터에는 노오용 선생도 있었다. 당시 19세였던 노오용 선생은 14~15일 양일간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7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돼 옥고를 치렀다.
노오용 선생이 참여한 의령 만세운동은 3월 3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구여순과 그의 누이동생 이화경이 계획한 것으로 알려졌다.

노오용 선생 등의 의령읍 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거증 자료./경남도/
1936년 경상남도경찰부가 기록한 ‘고등경찰관계적록 1919~1935’ 등에 따르면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서울로부터 지급 전보(일반 전보보다 빨리 전송하는 특별 전보)가 날아왔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여동생 구은득이 급병으로 입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접한 구여순은 이화경과 함께 3월 3일 서울에 도착했다. 하지만 전보는 오빠를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시키기 위한 구은득의 꾀였다. 이후 이들은 의령으로 돌아와 정용식, 최정학, 이우식, 김봉연 등과 함께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계획한 것이다.
함양군 금천리 안의시장에서도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서하면 봉전리 김병창, 임채상, 정순완, 전재식, 조제헌 등은 지곡면 보산리 급천서당의 청년 학생 김채호와 금천리의 최석룡 등과 함께 안의시장 의거를 밀의한 후 거사일을 1919년 3월 31일 장날로 정했다.

최석룡 선생 등의 함양 안의시장 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거증 자료./경남도/
거사 당일, 이들은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감춰 안의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 1시 30분께 김병창 등 5명은 장 복판에서 감춰온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려는 순간에 일제에 붙잡혔다.
이후 최석룡 선생은 오후 2시께 직접 만든 태극기 10개를 군중에게 나눠주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경은 거창수비대에 지원군을 요청, 최석룡 선생을 비롯한 주동 인물들은 검거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최석룡 선생은 1919년 5월 14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6개월의 형을 받아 공소 제기했으나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됐다. 다시 상고했으나 기각돼 서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밀양에서도 조선의 독립을 꿈꾼 주민의 열망이 들끓었다. 1919년 4월 4일 밀양군(현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단장천 옆에 자리한 장터. 장날인 이날 장준식 선생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태룡리 만세운동은 불교계가 주도했다는 특징이 있다. 거사 전날인 4월 3일 밀양 표충사 스님 2명이 단장면 고례리의 한 주막에 주민을 모아 태룡리 장날인 4일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한 것이다.
체포된 장준식은 1920년 3월 18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장준식 선생 등의 태룡리 독립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거증 자료./경남도/
◇만세운동 105년만 대통령 표창 서훈= 손치봉, 노오용, 최석룡, 장준식 등 4명의 독립운동가는 만세운동 105년 만인 지난해 11월 3·1운동 분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은 스스로 기록을 숨겨야 했고,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이 지워지거나 축소, 왜곡됐기 때문에 포상 신청에 필요한 공적내용과 거증자료를 찾는 것이 순탄치 않다. 더구나 어렵사리 서훈을 인정받더라도 후손을 찾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이들 4명과 앞서 보도된 김성도, 감태순 선생 등 지난해 경남도가 발굴해 정부로부터 서훈받은 독립유공자 6명 중 3명(김성도, 노오용, 손치봉)도 후손을 찾지 못해 보훈부에서 표창을 보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만세운동 현장을 찾아서= 유일하게 후손이 도내에서 살고 있는 장준식 선생의 흔적을 찾아 당시 만세운동을 했던 밀양 옛 태룡리 장터를 지난 20일 찾았다.
만세운동의 현장이었던 밀양 태룡리 장터는 현재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1959년 발생한 태풍 ‘사라’로 단장천이 범람하면서 장터가 휩쓸려 간 것으로 알려졌다. 태풍이 휩쓴 자리는 비닐하우스와 밭, 우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라는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대다수 마을 주민들조차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인근 마을 회관에서 만난 서모(85)씨는 “장터가 태풍에 떠내려간 건 알아도 여기서 만세운동했다는 건 처음 듣는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어르신들도 “우리 동네엔 만세 운동한 사람이 없다”, “기억하시는 분들은 다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말을 보탰다.
발길을 옮기려던 차 옛 장터를 지나는 나이가 지긋한 한 어르신을 만났다. 마을 주민 장종필(89)씨는 “마을 어른들한테 이곳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고 들었다”며 유모차를 끌며 옛 장터 터를 직접 안내했다. 장씨는 “이제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라며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태룡리 장터 만세운동의 역사적 가치는 장터에서 2.4㎞ 떨어진 단장면 행정복지센터 주차장 화단에 설치된 ‘태룡장터 만세운동비’를 통해 보존되고 있었다. 밀양문화원이 2005년에 세운 표지석이다.

밀양시 단장면행정복센터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태룡장터 만세운동비./김승권 기자/

밀양시 단장면행정복센터 입구의 태룡장터 만세운동비 뒷면에 태룡장터 만세운동 발발지 지도가 그려져 있다./김승권 기자/
하지만 이 표지석은 만세운동이 일어난 실제 현장과는 거리가 멀어 이를 옮겨 세울 필요성이 제기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지난 2010년 펴낸 ‘국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에는 ‘태룡 장터 3·1만세시위와 관련해 밀양문화원에서 표지석을 세웠으나 만세시위와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설치하여 옮겨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조사 의견이 담겨 있다.
무관심 속에 역사를 생생히 증언하는 장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을주민들 기억에서조차 잊혀 가고 있다.
김태형 기자 thkim@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