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나공간] 김해 진례 ‘피어어피어’
폐공장이 다양한 취향·경험 어우러진 열린 문화공간으로
단무지·싱크대 공장이던
40년 넘은 콘크리트 건물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
옛 흔적 살리려 개조 최소화
깨진 벽·낙서도 그대로
책 읽는 작은도서관부터
지역 예술가 작품 보는
넓은 메인테이블까지
구역 나눠 다른 경험 제공
핸드메이드 작가 프리마켓
재즈콘서트·북클럽 등 진행
“전국서 오는 손님 보면서
지역 브랜딩 목표도 생겨”
김해 진례의 한 마을, 패널로 이뤄진 공장들 사이에 ‘유심히 보아야 나타나는’ 공간이 있다. 흰색으로 페인팅된 콘크리트 건물로 이뤄진 신생 카페 ‘피어어피어(PearAPPear)’다. 낙후된 지역이라 여느 카페처럼 근사한 ‘뷰(view)’ 하나 없는 이 카페 안에서, 공간 운영자와 손님들이 숨어 서로의 취향을 속달거린다.

옛 공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깨진 콘크리트 벽을 사이에 두고 전시·공연할 수 있는 공간(왼쪽)과 커피와 빵을 만드는 공간이 보인다.
◇유심히 보아야 나타나는 것들= 카페 ‘피어어피어’의 전신은 공장이다. 동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닥광(단무지) 공장’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은 ‘싱크대 만드는 공장’이었다고 했다. 아무튼 건물이 가진 세월을 다 꼽으면 40년이 넘는다. 패널 공장이 대부분인 요즈음에는 찾기 힘든 콘크리트 건물이다. ‘피어어피어’ 공간운영자인 오선아(38)씨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건물이 가진 스토리를 살렸다. 카페 입구에 자리 잡은 커다란 철문도 공장에서 사용하던 것에 검은 페인트 칠만 하는 등 내외부 개조를 최소화했다. 내부 벽면이 깨진 형태도, 기둥에 쓰여 있는 알 수 없는 숫자나 손때 같은 것들도 그대로 남겼다. “공간이 가진 역사와 스토리의 장점을 그대로 남기고 싶었죠. 공장이던 시절에 남겨진 흔적들이 재밌어요. 자재를 옮기다가 벽이 부서졌나, 어쩌다 기둥에 숫자를 써 놨나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들고요.”
유심히 보아야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카페의 이름은 ‘Peer(유심히 보다)’, ‘Appear(나타나다)’의 합성어다.

하늘에서 본 '피어어피어'.
◇공간, 경험과 영감의 원천이 되다= ‘피어어피어’는 머무르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의 본질을 모토로 삼는다. 외곽 지역 카페는 바다나 강, 숲을 목전에 두고 ‘뷰’를 자랑하지만 ‘피어어피어’의 주변에는 오로지 패널 공장과 작은 마을 주택만 듬성듬성 있다. 카페에서 흔히 사용되는 유리벽이나 커다란 유리창은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선물 상자처럼 꼭꼭 닫아 놔 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폐쇄적이지만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공간이다.

옛 공장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깨진 콘크리트 벽 너머로 전시,공연을 할 수 있는 카페의 가장 큰 공간이 보인다.
‘피어어피어’의 주력은 바깥이 아닌 카페 자체에 있다. 카페 내부는 공장처럼 여러 구역으로 나뉘고 각 구역마다 접할 수 있는 경험이 다르다. 진입로에서 오른쪽 공간은 ‘작은 도서관’이다. 건물 안에서도 낮은 층고를 이용해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기획된 공간이다. 이곳에는 스탠드 조명이 올라간 테이블과 작은 책장이 위치해 있다. 책장에는 오씨가 읽었던 에세이, 소설, 시집 등 서적 100여권이 수납돼 있다. 이곳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북클럽이 진행되고 있다. 오씨를 포함해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손님들이 참여하는 모임이다.
진입로에서 좌측에 있는 공간은 카페에서 가장 넓은 곳이다. 공간 가운데 넓은 메인 테이블이 있는데, 이 공간에는 언제나 카페의 정체성이 담긴다. 정체성이라 함은 누군가의 ‘취향’이다. 예컨대 공간운영자인 오씨가 떠나가는 봄을 그리워하며 테이블 위로 꽃을 매달아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돌덩이를 올려보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지금은 피어어피어 구성원 취향에 맞춘 크리스마스 장식이 꾸며졌다.

전시,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에 지금은 크리스마스 장식이 꾸며져 있다.

오선아 '피어어피어' 공간운영자가 읽었던 100여권의 책이 수납되어 있는 책장과 스탠드 조명이 있는 테이블로 구성된 '작은 도서관' 공간.
손님들의 취향으로 메워지기도 한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소장품이 전시되기도 했고, 손님으로 찾아온 지역 예술가들이 오씨와 협업해 일정 기간 자신의 작품을 걸어두기도 한다. 결국은 다양한 사람들의 취향이 모여드는 ‘열린 공간’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것이 공간의 철학이 됐다. “작년 이맘때 메인 테이블에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 놨더니 손님들이 좋아해 줬어요. 여기 인근에 도예마을이 있고 미술관도 있으니 공간에 작은 전시를 하면 어떨까 싶어서 ‘길천도예’와 협업을 했고 그게 협업의 계기가 됐죠.” 이후에도 지역 예술가들이 찾아와 인연을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의 작품을 공간에 놓게 됐다. 오씨의 취향이 담긴 공간에 예술가들의 취향이 담긴 작품이 자리한다. 서로의 취향을 공유하고 또 영감을 얻어내는 순간들이다. “골판지로 로봇의 형태를 만드는 작가님이 우연히 카페에 방문했어요. 그런데 저희 공간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고, 이곳에서 전시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죠. 이럴 때 서로가 서로의 취향에서 영감을 얻게 되는구나 생각해요.”

누구나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
◇지역 브랜딩에 도움 되기를= 공간의 운영자이건 손님이건 공간에서 경험하고 영감을 얻는다. 그런 문화공간으로서 자리 잡는 것이 ‘피어어피어’의 방향성이 됐다. 이 정체성은 지역민들의 참여로 이뤄져 간다.
공간이 마음에 든 누군가가 드레스 화보를 촬영하기도 하고, 지역 핸드메이드 작가들이 모여 프리마켓을 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특별한 인연으로 피어어피어에서 열린 재즈콘서트는 벌써 5회째를 맞이했다. 방문한 손님의 제안으로 매주 하던 북클럽이 오는 27일에는 아이들이 음악과 함께 독서하는 자리가 된다. 내년에는 보자기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들이 전시를 하고, 실 공방 작가들도 작품을 선보인다. 손님들과의 협업으로 내년 9월까지 공간의 경험은 서로의 취향으로 가득 채워진다.
오씨는 커피 한 잔에 작품이 있고, 책이 있고, 공간의 스토리가 함께 하길 바란다.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전국에서 걸음한 손님들을 바라보며, 카페를 통해 공간이 속한 진례의 작은 마을을 브랜딩하고 싶다는 큰 포부도 가진다. “처음에는 공간을 키워서 다른 곳에도 오픈하는 사업적인 확장을 구상했는데, 지금은 이 한 공간의 브랜딩을 깊이 해보고 싶어요. 저희 팀이, 이 공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소
김해시 진례면 진례로 139-5
영업시간
월~금 11:00am~20:00pm
토·일 11:00am~21:00pm
@peerappear_official
오선아 '피어어피어' 운영자 Q&A
“뷰 좋은 카페 말고 경험할 수 있는 공간 만들고 싶었죠”

오선아 '피어어피어' 공간운영자./김승권 기자/
Q. 카페를 둘러보면서 ‘주인장의 센스’가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디자인과 관련된 일을 한 것인가?
A. 서울에서 동생과 드레스 쇼핑몰을 했다가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오고 싶어 지역에서 활로를 찾았다. 이전에 했던 쇼핑몰도 내 취향이 많이 반영됐었고, 지역에 와서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게 카페라고 미리 단정하진 않았다. 후보지 4, 5곳을 돌아보다 이곳을 보고 선택했고, 활용하기에 카페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해 하게 됐다.
Q. 대형 카페는 대부분 바닷가나 숲과 같이 경관 좋은 곳에 밀집한다. 공장 난개발이 있고 비교적 낙후된 지역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A. 지역에 도예가들이 모여 있고,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도 위치해 문화적으로 재미있는 동네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지역에는 편안한 소파에 앉아 좋은 뷰를 보여주는 대형 카페가 많고, 공간의 경험에 집중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관을 바라보며 ‘멍 때리기’보다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Q. 내부를 크리스마스 테마로 꾸며 뒀는데, 크리스마스 장식에 일반적인 ‘그린&레드’가 아닌 ‘블랙&레드’를 주로 차용하고 있다. 전체적인 공간도 그렇고, 취향이 명확해 보인다.
A. 내가 좀 그렇다. 옛날부터 비주류들이 좋아하는 취향을 탐해 왔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단골들도 내 취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더라. 사실 영리 목적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유입시켜야 하지만,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게 이 카페의 존재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글= 어태희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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