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흉내낼 수 없다, 60년 세월 머금은 ‘찐’ 레트로 감성
[무나공간] 진주 중앙시장 ‘삼각지다방’
유행 좇지 않고 지켜낸 추억의 아지트
입구 간판부터 예스러움 묻어나는 곳
고가구·공중전화·바둑판 소품 눈길
계란 노른자 동동 띄운 쌍화탕 주메뉴
복고 찾는 청년에게도 매력적인 공간
이번 달은 진주 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한 옛날 다방 ‘삼각지다방’을 소개합니다. 처음부터 다방을 다루고자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의도한 모든 것이 이곳을 가리켰다고 해야 할까요. 애초에 이달엔 ‘아지트스러운’ 공간을 가져오고 싶었습니다.

진주시 대안동 중앙시장 인근에 위치한 삼각지다방 내 영화 ‘진주의 진주’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다.
지난번 헌책방 때와 같이 ‘창원 아지트’, ‘김해 아지트’와 같은 검색어로 정보의 바다를 헤매다 얻어걸린 곳입니다. 이름을 보고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해 여름 개봉한 김록경 감독의 영화 ‘진주의 진주’ 배경이 된 공간이었어요. 영화에서 기존의 상호를 이용한 까닭에 ‘실제 있는 곳이라고?’ 싶은 마음이 결정적으로 발걸음을 부추겼습니다.
이 공간을 택한 이유를,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오롯이 공감하게 하자면 아지트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좋겠습니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 ‘사람들이 어울려 모이는’ ‘은밀한’ 느낌이 드는 장소거든요. 슬프게도, 일부러 숨겨둔 것은 아니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지방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떠나는 이유이지만요.

삼각지다방 바깥에 빛바랜 간판.
찾아가는 길부터 은밀했습니다. 길치이므로 경험한 대로 서술하자면, 중앙시장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로 내려옵니다. 왼편으로 돌아 아리따운 한복들이 가득한 주단집을 양쪽에 끼고 시장 바깥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입니다. 시선을 2층으로 돌리면 예스러운 간판과 유리창에 붙은 ‘삼각지다방’이란 빛바랜 시트지가 공간의 존재를 알립니다. 이 밖에도 이곳에 다방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표지가 하나 둘 셋 넷…. 그럼에도 저는 단번에 이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월에 묻혀버린 젊음이 이런 걸까요.
계단이 바로 보이는 조그만 입구, 열 개가 채 되지 않는 계단을 올랐더니 민트색 문과 커다란 거울이 있습니다. 이곳에도 빨간 글씨로 ‘다방’이라는 표시가 즐비합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계단이 맞이합니다. 뚜벅뚜벅 올라가면 왼편으로 각종 차를 제조하는 주방 공간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고개를 돌렸는데….
“사장님, 여기 왜 이렇게 커요?”
방문객을 보고 누군가 일어나기에 사장님이라고 추정하고 꺼낸 첫마디였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도 드리기 전에요. “여기, 공간이 크다~”라고 그가 화답합니다. 건물 밖에서 볼 때 깨진 유리창을 본 것 같아 “사장님, 밖에서 유리창 깨진 데를 봤는데 어느 쪽이에요? 왜 안에선 안 보이지요?”라고 그분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몰라~ 밖에서 보니 엉망이대. 안에서만 보니 몰랐지.”

고정순 삼각지다방 사장이 쌍화탕을 만들고 있다.

삼각지다방 쌍화탕
꾸미지 않아 더 매력적인 이 다방 공간처럼 담백하고 구수하게 손님을 맞아주는 사람, 고정순(69) 사장님입니다. 사장님은 괜히 멋쩍은지 말씀을 보탰습니다. “물론 안에도 엉망이지만. 오래 되니 푸석푸석해서 못도 못 박잖아, 부서질까 봐.”
사장님 기억에 이곳은 60년이 넘었습니다. 본인 차례에 오기까지 아마 사장이 최소 네댓명은 바뀌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입니다. 그가 사장이 되었던 15년 전과 지금의 다방 모습은 거의 같습니다. 화려한 무늬를 자랑하는 가죽소파와 테이블 같은 각종 고가구, 벽에 붙은 그림 액자들과 요즘엔 보기 힘든 브라운관 TV, 공중전화도 그대로 자리를 차지합니다.

삼각지 다방의 공중전화기.
다방 안쪽 테이블 곳곳을 채운 바둑판과 소쿠리에 담긴 바둑알, 장기알이 눈에 띕니다. 이게 인테리어인가 실제 쓰는 것인가를 혼자 고민하던 그때 한 어르신 손님이 다방으로 들어섰습니다. 어르신은 익숙한 듯이 중간 자리에 앉아 신문을 펴서 한참을 읽으십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요. 비슷한 연배의 손님들이 두 분 더 오시자 보던 신문을 덮어 제자리에 두시고는 바둑판 자리로 옮겨 앉으시는 어르신입니다.
저 멀리서 “단골”이라고 알려주시는 정순 사장님께 “저 바둑판이 진짜 쓰는 거였어요?”라 질문을 했다가 혼났습니다. “그럼, 진짜 쓰니까 두지”라는 당연한 대답과 함께요.
“처음에 내가 여기 받을 때도 저 바둑판은 있었지. 예전 그대로라. 예전에는, 저쪽에서는 바둑 두고 이쪽에서는 선 보고 그랬지.”
바둑알이 세월을 증명합니다. 반지르르하던 광택은 간 데 없고 장기알 역시 음각으로 새긴 한자체도 지워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삼각지 다방 소파에 놓여 있는 바둑판,바둑알,장기알.
“공중전화 지금도 돼요?”란 질문을 할 때쯤 사장님은 끝없이 질문을 퍼붓는 사람의 나이를 실감한 듯 답하셨습니다. “공중전화는 내 올 때만 해도 됐었지. 근데 지금은 전화원(교환원)이 없잖아.”
예전엔 손님이 많아서 직원 세 명을 뒀다고 합니다. 엄청 오래된 일로 생각하고 들었는데 2022년까지도 그랬다고요. 지금은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그래도 지난해 여름 ‘진주의 진주’가 개봉한 직후에는 영화를 본 젊은 손님들이 다방을 찾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저쪽에서 바둑 두고 계시는 어르신들과 새벽시장 상인들, 지인들 정도만이 고정 손님일 뿐입니다. 예전엔 ‘24시간’이었던 다방이 지금은 ‘9~10시간’만 영업하는 이유이지요.
“5시만 되어도 손님이 없어. 다방을 찾는 손님들이 다 어르신이 되었잖아. 다들 일찍 귀가하신다고. 그래서 나도 늦어도 6시면 집에 가지. 대신에 아침에는 커피나 차 찾는 손님들이 있으니 일찍 나오지. 시장 상인들이 가게 열기 전에 와서 커피 먹고 일 시작하거든.”
‘사람이 왜 안 올까요’ 묻는 질문에 정순 사장님은 서운함 가득 담긴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나. 사람이 안 살잖아. 오랜 손님들은 자꾸 나이가 들어 멀리 떠나고, 젊은 사람들은 지역을 떠나고. 올 손님이 있겠나.”
바둑을 두고 계시던 80대 어르신이 지금 정순 사장님이 오기 전부터 이곳을 출입했던, 20년도 더 된 삼각지 다방의 단골입니다.

삼각지다방에서 단골 손님들이 바둑을 두고 있다.
손님이 없으니 다방을 유지할 명목이 없습니다. 정순 사장님은 한 2년 더 운영하다가 문을 닫을 생각도 합니다. 다행히도 사장님부터 이 공간에 대한 애착이 큰 덕분에 당장 그날이 오지야 않겠지만, 언젠가 올 것이라는 건 사장님도 손님들도 어느 정도 예상하는 부분입니다.
“돈 벌려고 했으면 지금 문 열어놓고 있겠나. 추억의 장소, 아지트같이 여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시 찾을 수 있게 하는 데 의미가 있는 거지.”
15년을 매일 드나들면서도 다방 공간이 여전히 좋다는 정순 사장님은 지난해 영화 개봉 후 잇따른 젊은 손님들의 방문이 뜻깊었습니다. 사장님 표현으로 ‘아무것도 아닌 그냥 다방’에 청년들이 오가니 그들의 기운을 받아 늙은 다방도 젊어지는, 기운이 나는 경험을 한 것 같았다고요. 그들의 방문이 잠깐에 그쳤다고 말하던 사장님 얼굴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언젠가부터 레트로와 빈티지가 유행으로 떠오른 덕에 정순 사장님은 이 공간이 허물어지지 않고 활용되는 상상을 합니다. 실제 ‘진주의 진주’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촬영지로 섭외되기도 해온 삼각지다방이지만 사장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단발적인 활용이 아닌 세월이 흘러도 유지되는 공간이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아쉬워서 못 놓는다이가. 여기 공간이 진짜 크고 좋거든. 주변에서 여기 팔라는 소리를 많이 하는데 못 팔아. 왜냐하면 거기 팔면 여기 바로 허물어 없어질 거거든. 그래서 내가 잡고 있는 거라. 만약에 여기를 최대한 유지한다는 사람이 나오면 내가 공짜로도 줄 수 있지.”
이제 질문 제발 그만하라시기에 마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추천을 바라니 “여기 쌍화탕 전문”이라십니다. “지금은 카페 이런 거 그냥 시작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서울에 요식업협회 가서 한 달 배워왔거든. 완전 정통이다.”

찌그러트린 양은국자./김승권 기자/
따르기 좋게 찌그러트린 삿구(양은국자의 일본어)에 십전대보탕 엑기스를 끓이는 동시에 잔마다 땅콩, 호두, 잣을 채워 넣습니다. 설탕 조금, 커피 크리머 약간이 이 집의 비법인 듯합니다. 팔팔 끓인 십전대보탕을 잔에 붓고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우면 완성. “어릴 때 계란 한 알씩 안 먹었나. 단백질이다 단백질. 이거 한 잔 먹으면 든든해가 배가 안 고프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정순 사장님이 말을 보태주셔요. 커피도 맛있답니다. 원두 좋은 거 쓰신다고, 커피 좀 아는 사람은 알아볼 거라네요. 때에 따라 레몬차 등 담금차도 만들어 판다시니까 편하게 물어봐 주세요. “사장님, 여기 뭐가 맛있어요?”라고요.
이렇듯 추억 가득한 중장년층에게도, 레트로 감성을 즐기는 청년층에게도 매력적인 곳이 바로 진주 삼각지다방입니다.
글= 김현미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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