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에세이] 나는 이야기한다- 강미나(수필가)

기사입력 : 2025-02-13 21:20:03

지금 시간은 흐른다. 나는 시각을 먹는다. 인생이란 무량한 시각을 어떻게 먹었느냐로 되물어온다. 말랑하고 담백한 것이 먹기에 좋으나, 딱딱하고 드라이한 쿠키는 더러 꼭꼭 씹지도 않고 넘겨버린다.

시각을 먹으며 사는 인간들은 저마다 사연을 몸에 새긴다. 어떤 이는 얼굴에, 불룩한 아랫배에, 우아한 몸짓에, 낮은 목소리에 시간을 갖고 산다. 내 몸 안의 시간은 존재의 본질인 경험과 체험으로 이 순간도 지난다.

오십만 년 전 원시시대부터 그려진 이야기, 일상을 지배하는 이야기, 가슴 따뜻한 이야기, 살인을 멈추는 이야기, 마시는 한 잔의 물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다. 페르시아 왕에게 목숨이 달렸던 셰에라자드 왕비가 마법의 양념을 친 맛을, 세 치 혀로 그를 녹여낸 것도 이야기로 만들어낸 창조가 아니던가? 생명을 잉태한 이야기는 역사가 되고 지식, 인생, 예술, 학문도 이야기를 떠나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했다.

이야기는 무엇으로 만들었나? 말이라는 생명 탄생의 묘약이 아니던가? 오늘도 눈을 뜨면 말의 홍수 속에서 산다. 벽에서 튀어나온 말, 아이들이 노래하는 말, 내가 들어야 할 말들이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나간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말, 말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변종을 낳기도 하고, 명언이 되기도 한 건 시간이 안다. 지식의 도깨비굴을 지나고, 가시덤불에 상처도 입고, 달콤한 언어유희에 취하기도, 정갈한 언어 숲에서는 치유를 받기도 한다.

말을 모아 글을 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말하기도 쉽지 않은 터, 하물며 글을 짓는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과제다. 내가 분명 말로 그려 낸 것은 비단잉어였는데, 세상의 귀들은 붕어라고 들으면 그 또한 낭패 아닌가. 마음속 심상을 오롯이 그려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육신이 아픈 적도 있다. 말하기도 글짓기도 힘들어 침묵과 연필을 숨긴다고 해도 대나무밭 가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소리 내는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

1%의 영감에 99%의 노력이 들어가 명작을 만들어 낸다는 명제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경험이라는 줄기의 정상에 자리하되 뿌리 없이는 피지 못하는 체험의 꽃은 내 몸을 덜어 빚는다.

늘 좋은 글을 읽고, 쓰다듬고, 외로워지고, 사랑하며 한 몸이 되어 젖어야 제대로 된 글 하나 만든다는 스승의 말씀을 충실히 새겨야겠다.

변종의 꽃을 피우기 위해 글 쓰는 이들에게 밝은 길 하나를 내어주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보다는 산모롱이 돌아 함초롬히 향기 품은 작은 풀꽃이 아름답다고.

내 몸의 피와 살과 뇌수를 덜어 핀 세상에 하나뿐인 꽃, 쥐바라숭꽃. 언제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오늘도 셰에라자드 왕비처럼 이야기의 주술에 들려 오만가지의 세상 이야기들이 내 귀를 스친다. 지금도 시간은 흐른다.

강미나(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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