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 받아쓰기- 김현미(문체부 기자)

기사입력 : 2025-02-24 19:17:40

결국 그 책을 샀다. 얼마 전 모임에서 나를 뺀 참석자 모두가 이야기하던 책, ‘딕테’다. 1982년 미국에서 발간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차학경의 첫 책이자 유작, 탈식민주의·페미니즘문학의 컬트 클래식이라는 사실부터 구미가 당기긴 했었다. 절판도서의 재출간이라는 점과 책의 형태를 띠지만 책이 아니라던 이름 모를 독자의 감상평도 한몫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책을 사게 한 것은 바로 책 제목이었다.

▼‘딕테(dictée)’란 프랑스어로 ‘받아쓰기’라는 뜻으로, 프랑스어 학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부법으로 통한다. 프랑스어는 철자와 발음이 매우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학생들은 정확한 철자 습득을 위해 받아쓰기 연습에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고. 우리에게도 받아쓰기는 익숙하다. 한글을 한참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적던 것. 쓰는 이의 주체적인 의지가 반영되면 안 되는 것도, 같다.

▼차학경이 추구했던 관념예술의 기본은 ‘인류는 왜 말을 하는가’였다. 그래서 그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너머를 봤다. ‘말하려는 고통’보다 더 거대한 것은 ‘말하지 않으려는 고통’을 전제로, 피란민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와 유관순, 잔 다르크와 성녀 테레즈 등 여성들의 음성과 삶을 ‘받아쓰기’했다. 남들과는 다른 받아쓰기, 그래서인지 차학경은 딕테를 ‘dictée’가 아닌 ‘DICTEE’로 썼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받아쓰기’란 말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언론’이란 단어 앞에서 특히 그렇다. 정치인 등의 말을 팩트 체크 없이 받아쓴 기사가 진실을 호도하고 사람을 죽이는 까닭이다. 출판계가 첫 출간으로부터 42년, 국내 출간 이후로 20년이 지난 책 ‘딕테’를 재출간하는 의미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원하고 시대의 흐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우리의 언론이 ‘받아쓰기’ 아닌 ‘받아쓰기’를 실행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미(문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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