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텍스트힙’ 넘어 ‘라이팅힙’ 열풍
필받아서 씁니다 사소한 나만의 행복
최근 2030세대 ‘필사’ 인기
책의 인상 깊은 구절 기록
마음의 안정 찾는 데 도움
서점 곳곳 관련 코너 등장
철학·헌법·가사집 등 다양
SNS·오픈채팅서 인증도
교보문고 지난해 매출
전년 대비 692.8% 증가
필기·문구류 판매도 껑충

#직장인 김예랑(28)씨는 최근 필사책 한 권을 구입했다. 무의식적으로 숏츠나 릴스 등 짧은 영상을 시청하는 대신 읽고 쓰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다. 그는 “휴대폰으로 생각 없이 영상을 보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데, 정작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며 “필사를 하면서 생각 정리도 되고, 손으로 쓴 글은 오래 기억에 남더라. 요즘 읽는 즐거움과 쓰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직장인 이유라(32)씨는 평소에도 책을 읽고 인상 깊은 문장을 기록해왔다. 한 자, 한 자 직접 손으로 눌러 담으면서 마음에 위안도 얻는다고 한다. 어느덧 펜과 종이에 익숙해지다 보니 자연스레 좋은 필기구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필사할 때 써보기 위해 처음으로 만년필을 구매했다” 며 “좋은 연필, 볼펜, 종이를 발견하고 사용하는 게 나만의 작은 행복이다”고 말했다.
독서를 멋지게 여긴다는 ‘텍스트힙(Text Hip)’ 열풍에 힘입어 이제는 읽는 것을 넘어 쓰는 것을 멋있게 여기는 ‘라이팅힙(Writing Hip)’이 부상하고 있다. 이에 독서와 함께 필사가 뜨고 있다.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쓰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창원 가로수길에 위치한 서점 ‘텍스트힙’에 마련된 필사책 코너
최근 도내 서점 곳곳에서는 ‘필사’ 관련 책들이 방문객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25일 찾은 창원 그랜드문고. 다양한 책 큐레이션 사이 ‘필사’ 코너가 서점 한편에 마련돼 있다. 말 그대로 수십 권의 필사책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필사책들은 보통 필사하기 좋은 구절 한 페이지와 함께 필사할 수 있는 페이지로 구성돼 있다.
서점 방문객들은 필사 코너에서 발길을 멈추고 책들을 찬찬히 구경한다. 서점 입구를 들어오면서부터 ‘필사책 어디 있나요?’라고 물어오는 손님도 있다.
처음부터 이곳에 필사 코너가 구성된 건 아니었다.
지난해 불어온 텍스트힙 열풍과 함께 그해 10월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필사책을 찾는 손님이 급증하면서 서점에서는 두 달 전 처음으로 필사 큐레이션을 마련했다.
그랜드문고 관계자는 “평년보다 필사책을 구매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인기를 체감하고 있다”며 “특히 지난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전보다 필사책을 찾는 분들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창원 그랜드문고에 마련돼 있는 필사책 코너. 다양한 필사 관련 책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날 창원 가로수길에 위치한 서점 텍스트힙에서도 필사책을 모아 놓은 필사 코너가 눈에 띈다. 한편에는 책 한 권과 함께 마음에 와닿는 문장을 필사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다.
조문주 텍스트힙 대표는 “세대를 막론하고 전 연령층 분들이 필사 코너에 머물러 책을 보고 가면서 관심을 가져주신다”며 “특히 요즘 젊은층에서는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필사책들이 인기가 많다”고 말했다.
또한 이곳에서 운영하는 북클럽에서는 오픈 채팅방에서 필사 인증도 진행하는데, 필사에 대한 참가자들의 반응도 좋다.

서점 텍스트힙 한편에 마련된 필사 공간
조 대표는 “필사할 문장을 찾아가며 책을 읽으면 독서에 대한 집중도가 굉장히 높아지고, 읽고난 뒤 여운도 달라진다”며 “또 공책에 남아 있는 글들이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걸 각인시켜 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같은 날 창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 인문·역사 부문 4위·8위에 필사책이 자리잡고 있어, 필사에 대한 인기를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이곳에서 만난 20대 홍모씨는 “예전에는 시 문구, 명문장 필사책에 그쳤다면 지금은 가수 가사집, 헌법 등 다양한 종류의 필사책이 나오고 표지도 눈길을 끄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실제로 지난해 필사책 판매는 전년 대비 692.8% 증가했다. 출간 종수도 57권에서 81권으로 42.1% 늘었다.

25일 창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인문·역사 코너 4위와 8위에 자리한 필사책.
이처럼 필사책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시와 산문을 위주로 한 정형화된 필사책이 많았다면 지금은 프리드리히 니체 등 특정 철학자들의 문장을 필사하는 책을 비롯해 헌법을 필사하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를 필사하는 책까지 등장했다. 또한 필사는 SNS를 통해 공유하거나 오픈채팅을 통해 함께하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필사스타그램’을 검색하면 12만 이상의 게시물이 나온다. 카카오톡 오픈 채팅에는 ‘1일 1필사’, ‘필사 인증방’ 등 필사를 매개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모임을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라이팅힙 열풍에 필사 관심도가 커지면서 필기구나 노트 등 문구류 매출도 증가하고 있다.
29CM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지난 12일까지 문구·사무용품 거래액이 전년 대비 75%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카테고리별로 살펴보면 고급 만년필·볼펜·연필 등 필기구는 2.4배 늘었고 다이어리·플래너는 64%, 노트류는 43% 이상 거래액이 많아졌다.
프리미엄 필기구와 노트 브랜드부터 개성 있는 디자인 문구 브랜드까지 전반적으로 문구용품 매출이 크게 뛰었다. 국내외 고가의 문구 아이템을 소개하는 브랜드 포인트오브뷰는 이 기간 29CM에서 거래액이 전년 대비 7.6배 넘게 증가했다.
해외 유명 연필을 선보이는 브랜드 ‘흑심’과 디자인 문구 브랜드 ‘오이뮤’ 역시 거래액이 2배 이상 늘었다. 만년필용 노트로 유명한 일본 문구 브랜드 ‘미도리’ 거래액도 75% 이상 뛰었다.
글·사진= 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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