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이달균의 경남 영화 촬영지 돋보기] (13) 쎄시봉- 통영 당포성지

그때 그 감성, 그대로 되감다

기사입력 : 2025-02-13 21:14:20

최영 장군의 ‘전승지’이자
이순신이 ‘당포승첩’ 이룬 곳
영화선 ‘로맨스 장소’로 등장
송창식·윤형주·이익균 만남
‘트리오 쎄시봉’ 복고감성부터
조영남 가수 데뷔 추억 담아



◇우리 충무김밥 먹으러 통영 갈까?= 영화 ‘쎄시봉’과 통영은 어떤 등식으로 이어질까? 60·70·80 세대의 문화 속에 아로새겨진 음악감상실, 그것도 서울 무교동(나중 명동으로 이전)에 있던 ‘쎄시봉’과 먼 남도의 작은 도시 통영이라니! 그때는 통영이 아니라 충무였다. 1960~1970년대의 충무는 도시라기보다는 어촌에 가까웠다. 영화 속엔 뉫살 이는 바다와 섬을 배경으로 고즈넉한 통영 당포성지가 나온다. 누군가가 일러주지 않으면 그 한 장면이 당포성지인 줄 알기는 어렵다. 그저 바다를 내려다보는 잔디밭 위에 두 남녀 주인공이 앉아 있는 장면이기에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다만, “충무김밥이 먹고 싶다”는 말을 새기면서 “주인공과 통영이 어떤 연관성이 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당포성지는 고려 공민왕 23년에 최영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전승지이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것을 이순신 장군께서 1592년 6월 2일 당포승전(唐浦勝戰)으로 탈환하였다. 그해 8월 14일 한산대첩(閑山大捷)으로 해상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사기와 전의를 상실케 하는 결정적 수훈을 세우는 교두보가 된 곳이다.

이 영화와 이런 역사적 사실과는 별 관계가 없다. 하지만, 주인공 오근태(정우)와 민자영(한효주)의 달달한 로맨스가 이뤄지는 현장이기에 찾아온 것이다. 오늘은 클래식 음악 해설가 김창일씨 내외분과 흥사단 진주지부장 박흥모씨가 길동무를 해주었다. 다들 음악에 관심이 많아 촬영 현장에서 영화를 새롭게 느껴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동행하였다.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인 오근태(정우)와 민자영(한효주)의 로맨스가 이뤄졌던 장소인 통영 당포성지./이달균 제공/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인 오근태(정우)와 민자영(한효주)의 로맨스가 이뤄졌던 장소인 통영 당포성지./이달균 제공/

◇그때, 그 레트로 감성에 기대어=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쎄시봉’은 2015년 개봉되었다. 김현석 감독은 왜 40년이 지난 후에 ‘쎄시봉’을 불러내었을까? AI로 대변되는 디지털시대에 낭만에 기댈 수 있는 아날로그가 그리웠기 때문일까? ‘YMCA 야구단’을 연출한 것을 보면, 레트로 감성을 사랑하는 감독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하지만 한국 포크 음악을 모르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큰 설득력을 얻기엔 다소 한계가 있다. 뮤지컬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멜로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한 시대의 추억 속으로 여행하다 보면 새롭고 입체적인 감정이 살아날 수도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겐 청·통·맥이란 말은 생소하다. 1960~1970년대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는 한국 청년문화를 일컫는 상징이었다. 그런 문화 현상은 서울에서 비롯되어 지방 소도시에까지 거대하고 새로운 파장을 낳으며 번져갔다. 이런 흐름은 젊은이들을 포장마차, 음악감상실, 고고클럽 등으로 이끌면서 저마다 추억의 흑백 사진첩 하나씩을 갖게 했다.

암울한 시대일수록 열정을 소비할 곳은 필요하다. 그중 ‘쎄시봉(C’est si bon)’과 ‘쉘브루(cherbourg)’는 대표적인 음악감상실이었다. 구수한 입담꾼으로 인기 DJ였던 이종환은 나중 쉘브루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당시 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이름은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 말이 더 이국적이고 고상해 보이는 것도 한몫을 했으리라. 그땐 프랑스 영화도 종종 개봉되곤 했는데 1965년에 상륙한 자크 데미 감독의 뮤지컬 영화 ‘쉘브르의 우산’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 라이벌 클럽으로 여러 번 거론되는 오비스캐빈(OB’ Cabin) 또한 만남의 장소로 인기였다. 이곳은 음향 시설이 좋아 방송국 관계자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이곳들은 1세대 대중음악평론가 이백천, 연예기자 1호 정홍택, 영화감독 이장호, 소설가 최인호, 방송작가 김수현, 시인 김지하 등이 사랑한 곳으로 유명하다. 음악을 듣는 것은 물론 직접 노래나 장기자랑을 하고, 퀴즈를 풀면서 젊음의 낭만을 만끽하던 곳이었기에 대학생과 직장인, 올된 고교생들이 몰래 사복으로 갈아입고 찾아오곤 했으니 지난 연대의 추억을 간직한 장소임엔 틀림없다.

영화 쎄시봉 스틸컷.
영화 쎄시봉 스틸컷.

◇전설의 듀엣 트윈폴리오 탄생= 젊은이들의 명소 쎄시봉엔 매주 금요일 장기자랑대회가 열렸다. 객석 앞의 작은 무대, 막이 열리면 ‘대학생의 밤’이란 현수막이 붙어 있다. 미8군 무대와 함께 이곳은 한국 최초의 경연장이었고, 대학가요제의 효시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사장 역할의 권해효는 오디션 심사위원장 역할을 겸한다.

여대생들은 무대 위에서 천을 덮어쓰고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치며 춤을 춘다.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낭송하며 퍼포먼스를 하는 이 촌스러운 장면은 시극의 초창기 모습이라 퍽 정겹다. 이 극의 주인공은 연기 지망생이며 쎄시봉의 뮤즈인 민자영(한효주)이다. 민자영은 가상의 인물이지만, 당시 실제 이곳의 뮤즈였던 윤여정을 떠올리게 한다.

쎄시봉은 뭐니 뭐니해도 트윈폴리오를 탄생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이곳의 사회자는 홍익대 학생인 이상벽이었다. 그는 이 전설의 듀엣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어느 날 무대 위엔 노숙자를 방불케 하는 남루한 의복을 한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기타를 치며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의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른다. 순간 객석에선 한동안 박수도 잊은 채 고요했다. 놀러 온 조영남 역시 귀를 의심했다. 홍익대 학생이 아니면서 홍대 잔디밭에서 노래하던 송창식(조복래)을 이상벽이 쎄시봉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그 전설 중 빠질 수 없는 또 한 사람, 귀공자풍의 서울 토박이면서 연세대 의대생인 윤형주(강하늘)는 유리처럼 투명한 하이톤으로 보비 다린의 ‘로스트 러브(Lost love)’를 불러 곧바로 여학생들의 우상이 된다.

클래식으로 다듬어진 미성의 송창식은 결 고운 하이톤의 윤형주와 저음이 매력인 이익균과 함께 ‘트리오 쎄시봉’을 만들어 활동하자고 제의한다. 영화 속에서 가상의 인물로 나오는 오근태가 바로 이익균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방송국 출연이 이뤄졌는데 하필 이익균이 군대 갔기 때문에 송창식과 윤형주는 ‘트윈폴리오’라는 이름으로 급조하여 방송에 나가게 된다. 이익균은 2011년 ‘MBC 쎄시봉 설 특집’ 예능프로에 특별출연하여 송창식, 윤형주와 함께 트리오를 완성하여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었다. 소설가 최인호는 트윈폴리오에게 “사이먼과 카펑클의 화음을 능가하는 듀엣”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조영남 역할은 김인권이 특별출연했다. 조영남 특유의 온몸 비틀며 노래하는 모습을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낸다. 영화 속엔 나오지 않지만, 당시 조영남의 등장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으로 유명한 차중락이 게스트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날 펑크를 내는 바람에 부득이 사회자 이상벽은 즉석 무대를 주선한다. 객석을 향해 “오늘 이 무대에 올라와 장기를 보여줄 사람에게는 무료입장권 10장을 주겠습니다”하고 외쳤다. 그러자 한구석에서 친구들에게 떠밀려 나오는 한 사람, 군복 검게 물들인 옷에 우비와 장화, 안경도 없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는 나오자마자 피아노를 치며 마티 로빈스의 ‘돈 워리(dont worry)’를 불러 앙코르를 받아낸다. 조영남 데뷔의 순간이었다. 이후, 번안곡 ‘딜라일라(Deliah)’,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로 누구나 다 아는 인기가수가 되었다.

실제 쎄시봉 최고 가수는 정훈희였다고 한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등이 출연료 500원을 받을 때 정훈희는 1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1967년과 1968년에 신인 가수상을 받았고, 1970년엔 ‘안개’로 도쿄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한 스타였기 때문이다.


연예계 ‘대마초 사건’도 다뤄
‘하얀 손수건’·‘고래사냥’ 등
추억의 노래 듣는 즐거움 쏠쏠


◇한국 연예계를 초토화시킨 대마초 사건= 전반부가 쎄시봉 시절이라면 후반부는 장년이 된 현시점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가 주 무대이다. 이장희 역에는 진구에서 장현성으로, 오근태 역에는 정우에서 김윤석으로, 민자영 역에는 한효주에서 김희애로 각각 배우가 교체되어 나온다.

후반부의 얼개는 LA한인방송 사장으로 재직 중인 이장희와 미국에 출장 온 이익균, 그리고 민자영의 만남으로 펼쳐진다. 주요 소재는 1975년 한국 연예계를 초토화시킨 연예인 대마초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그때 대마초는 금지 대상 약물로 지정되지 않았는데 정치권에서 국면전환용으로 이를 이용한 측면이 많다. 이익균이 윤형주, 이장희를 비롯한 여러 명을 대마초 흡연자로 제보하여 갈등 구조의 주인공이 된다. 이유는 그가 사랑했던 민자영이 명단에 올랐는데 그녀를 구하기 위해 대신 그들의 이름을 댔다는 내용으로 구성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익균은 대마초 사건 전에 군대에 갔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기에 시점도 맞지 않고, 설득력도 약하다. 이런 무리한 설정으로 인해 후반부는 신파로 흘렀고, 처음 의도한 쎄시봉의 낭만과는 전혀 다른 결말로 마무리되고 만다.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170만 관객을 넘겼으니 흥행은 나쁘지 않았다. 그만큼 옛 포크 시대에 대한 향수가 많이 남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역시 70·80 세대의 저력을 실감케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주연급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였고, 낯익은 노래들이 차례로 나오는 결과가 아닌가 싶다.

어쨌든 제목이 그런 만큼 영화 속에는 많은 노래들이 흘러나온다. 번안곡으로 사랑을 받은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우리가 팝송에 입문할 때 가장 먼저 배웠던 닐 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도 한 장면을 차지한다. 이처럼 당시 팝송과 번안곡들은 전통가요로 불리는 트로트의 대척점에서 또 하나의 탈출구였으며 그 선택은 필연적이었다. 새 시대로 향한 꿈틀대는 욕망은 신중현으로 대변되는 록 계열의 창작곡, 포크의 새 지평을 연 김민기, 김정호, 정태춘 등등과 함께 한국음악은 다변화하기 시작한다.

◇쎄시봉은 저항과 열정, 낭만의 총합이다= 쎄시봉은 한국 청년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된 중요한 지점이다. 어쩌면 갇힌 한반도가 아니라 세계인과 함께 방향을 모색하는, 불 밝힌 작은 배 한 척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세대의 문화 현상이 된 국내외 환경은 어땠을까?

우리나라에 포크 음악이 들어오기 전, 미국은 모던포크가 전성기를 열었고, 시대성을 담은 개인 창작곡 위주의 현대음악이 한 장르로 자리 잡는다. 격변기는 대중음악의 변화와 함께한다. 새로운 음악은 전쟁이란 변곡점 위에서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의 참화가 채 아물기 전인 1965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다. 치열한 전쟁 속에서 미국 젊은이들은 서서히 반전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이 반전운동의 물꼬는 평등과 정의를 내세운 마틴 루서 킹의 민권운동과 궤를 같이하며 미국 전역을 흔들기 시작한다. 대학가에선 징병거부 운동, 흑인무장투쟁 그룹 ‘블랙 팬더’ 등이 등장하여 걷잡을 수 없는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포크 계열 가수들은 노래로 반전운동의 중심에 선다.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The river in the pines)’로 유명한 존 바에즈는 많은 뮤지션들과 합세하여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고, 밥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불러 끝나지 않는 욕망과 참화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들이 던진 이런 시대적 질문은 지구촌 청년들에 큰 울림을 주게 된다. (밥 딜런의 노랫말과 활동은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 이유가 된다.) 그리고 비틀스 멤버이면서 영향력 면에서 최고를 달리던 존 레논 또한 ‘Imagine’ 등의 노래로 전쟁의 참상을 일깨우는 운동에 동참한다. 그들이 던진 반전의 기치는 들불처럼 확산되었으며 지구촌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그런 기운은 서서히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상륙한다. 1969년 남산드라마센터에서는 미국에서 온 한 청년이 목소리를 토하고 있었다.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 마르요. 물 좀 주소. 물은 사랑이요. 나의 목을 간질며 놀리면서 밖에 보내네” 탁성으로 토해내는 약관의 젊은이는 한대수였다.

한국 청년문화는 그런 바람을 타고 거센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1975년엔 김지하 시인이 ‘타는 목마름으로’를 발표하고, 같은 해 하길종 감독이 영화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지향 잃은 젊은이의 절망과 방황을 정면에서 그려내었다. 이 영화 속엔 송창식이 작곡하고 노래한 ‘왜 불러’, ‘고래사냥’ 등과 김정호가 작곡하고 송창식이 부른 ‘날이 갈수록’이 화면을 찢고 나온다.

영화 ‘쎄시봉’은 청·통·맥으로 불리던 시대, 청년들의 열정을 소비하고 창조하던 만남의 장소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그런 저항과 희망이 총합을 향해가는 정거장 같은 곳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이런 장소는 있는가? SNS의 무한 광장을 나와 얼굴을 맞대고 저녁을 보낼 격론의 광장은 있는가? 영화를 통해 나는 묻는다. 그래서 시곗바늘을 돌려 먼지 묻은 창을 열고 그때를 조명해 보는 것이다.

이달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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