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도희주의 반차 내고 떠나는 Trip in 경남] (10) 만추, 의령 덕곡서원 가는 길
나붓나붓 춤을 춘다, 마지막 잎새 흔들리는 가을 끝자락
익어가는 단풍과 산 능선에 둘러싸인 덕곡서원
우뚝 솟은 Y자형 구름다리·출렁다리와 의령천
동서남북 펼쳐진 ‘만추의 파노라마’ 한 폭의 그림
붉게 타오르는 순간을 마주한 나그네 가슴도 심쿵
11월 달력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흔들린다. 와이퍼 틈새에 쌓여 있던 낙엽들이 차가 출발하자 깜짝 놀라 난분분 흩어진다. 도시를 휙 벗어나면 만산(萬山)이 홍엽(紅葉)이다. 가로수들은 거의 반은 옷을 벗어던지고 나목으로 변신 중이다. 지금쯤 의령 덕곡서원과 근처 구름다리 아래 청실동산이 적홍으로 물들고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기대감은 가속페달 위의 내 발등을 누르며 속도를 재촉한다. 가자. 만추의 캔버스를 내 안으로 들여놓고 붉게 타오르는 단풍들의 빛나는 순간을 마주하고 싶다.

의령천에 우뚝 솟은 구름다리. 이곳에서 바라본 먼 산과 의령천의 타는 가을풍경에 나그네의 얼굴마저 붉게 물든다./도희주 동화작가/

◇경남의 중심, 의령
의령군은 창녕군·함안군·산청군과·합천군·진주시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낙동강과 남강이 흐르고 있으며 행정구역은 1읍 12면이다. 어느 지역인들 서사가 없을까. 그러나 의령군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서사를 안고 있다.
홍의장군 곽재우의 신출귀몰한 계략과 의병들의 함성이 스며 있고,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덕곡서원이며, 조선어학회 중심인물인 이우식 선생, 이극로 선생, 안호상 선생 등 기라성 같은 선열들의 얼과 우리나라 경제계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지역이다. 의령군 자체가 한국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의령읍 하리에 들어서자 이미 저만치서 덕곡서원의 아름다운 팔작지붕이 점잖게 반겨준다. 너무 일찍 도착했을까, 아직은 태양이 서원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있지만 그 뒤 낮은 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은 이제 막 익어가는 중이다. 태양이 비추는 타오르는 산을 기대했지만 아직은 조금 못 미치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익어가는 단풍과 낮은 산 능선에 둘러싸인 덕곡서원은 한 폭의 그림이다. 시간이 천천히 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흐른다.

퇴계 이황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덕곡서원.
덕곡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효종 5년(1654)에 건립하여 위패를 모셔 놓은 곳이다. 현종 원년(1660) 임금으로부터 ‘덕곡’이라는 현판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팔작지붕에다 강당·솟을대문·사우각 등 전경이 빼어났다. 퇴계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여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고,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단풍과 서원이 이처럼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도 드물다. 서원을 중심으로 사방이 단풍이다. 바로 큰길 건너가 구름다리고 그 아래 의령천이 흐르는 수변공간이 청실공원이다.

덕곡서원이 보이는 구름다리 주차장.
의령천 주변 단풍들의 붉은 읊조림과 황금빛으로 꾹꾹 눌러쓴 가을 쪽지가 궁금했다. 차를 돌려 구름다리 주차장에 주차해도 좋고 아니면 잠시 걸어도 된다. 구름다리 주차장 건너 ‘청실동산’이라는 이름의 공원과 ‘청실쉼터’라는 팔각정자가 보인다. 그리고 옆엔 ‘구름다리 공원 안내도’가 있다.
의령천을 옆구리에 낀 산책로 주변 나무들도 저마다 단풍빛이 다르다. 한 그루의 나무에도 잎잎이 빛깔이 다르다. 벌써 나목이 있는가 하면, 철부지처럼 주변을 기웃거리며 아직 입어야 할 단풍 옷 색깔을 고르지 못한 나무들도 있다. 눈에 크게 띄지 않던 능수버들의 움직임을 그때 보았다. 느리게 흔들리는 품새가 양반가의 유학자 몸짓이다. 그렇지 여긴 의령! 능수버들도 퇴계학파의 후손일지 누가 알겠는가. 혼자 웃는다.

구름다리 건너편에 있는 팔각정자 ‘청실쉼터’.
바람이 분다. 단풍들이 바스락거리며 낙하한다. 산책로를 모자이크로 장식하기도 하고 수직으로 낙하하기도 한다. 몇 잎은 바람에 날려 의령천에 떨어진다. 순간 낙엽들은 나뭇잎 배가 되어 나붓나붓 떠간다. 뒤따르던 바람이 슬쩍슬쩍 노를 저어준다. 윤슬이 어깨를 움츠린다. 잠시 어떤 어종의 행적을 알리는 물보라가 퍼지다가 바람에 누그러진다. 찰나에도 나뭇잎들은 더 붉게 더 황금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화가 장승업으로 분한 최민식이 머리카락을 휘날리면서 타오르는 가을 한복판을 걸어가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마도 순천 선암사의 가을이었을 것이다. 어디 화가에게만 가을빛이랴. 가을, 그 타오르는 절정의 단풍은 보는 이의 가슴마저 절정으로 타오르게 한다.

가을빛으로 물든 의령천 주변.
◇구름다리와 출렁다리
의령천에 우뚝 솟은 구름다리에 올라 주변을 조감하며 앵글을 잡는다. 육교와 출렁다리의 조화가 실로 놀랍다. 국내는 물론이며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디자인일 듯하다. 의령군의 명물이라는 말이 가히 실감이 난다.
구름다리는 의령천 정비 사업과 함께 의령군이 48억 3000만 원을 들여 3년여의 공사 끝에 2005년 12월 22일 준공했다. 복합형 사장교(斜張橋) 형식의 Y자형 다리로 총 258m에 주탑 높이는 48m, 다리 높이는 19m에 이른다. 다리 가운데 바닥은 성긴 철망 구조다. 주탑과 보행로를 따라 400여 개의 LED 조명이 명멸하는 야경은 관광 의령의 랜드마크다. 다리 아래쪽 수변공원과 인공폭포, 산책로는 주민들은 물론 방문객들의 훌륭한 힐링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 번도 안 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온 사람은 없다는 곳 아닌가.

의령군의 힐링 명소 ‘구름다리’.
먼 산과 의령천의 타는 가을풍경에 나그네의 얼굴마저 붉게 물든다. 저만치 좌측엔 왜가리인지 물오리인지가 자맥질하고 우측엔 오리배 몇 척이 정박해 있다. 한때 뜨거웠던 여름의 열정을 담았을 오리배. 휑한 빈 좌석에는 지난여름 커플들이 남긴 웃음소리처럼 낙엽들이 바람에 뒹굴며 떠들썩한 몸짓이다. 누군가의 가을 이야기가 떠오른다.
“낙엽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람이 부는 날 낙엽이 춤추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시라 타미르’인데 물론 나그네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글귀가 아름다워서 기억할 뿐.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구름다리의 주탑 벽면엔 ‘의령구름다리 색채디자인 콘셉트’와 ‘의령구름다리 전설’ 안내판이 있었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호국 충정을 담아 그가 여러 전투에서 홍의(紅衣)를 입고 전투에 임하던 것을 기리기 위한 것’과 ‘주탑의 18개의 고리는 충익사의 의병탑을 형상화한 것이며, 이는 곽재우 장군과 17명의 장병을 상징한다’고. 그리고 구름다리의 전설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정암진 솥바위와 관련하여 ‘솥바위 반경 30리(12km)에서 부자가 난다는 전설과 함께 실제로 삼성그룹 호암 이병철(의령군 정곡면), 효성그룹 만우 조홍제(함안군 군북면), LG그룹 연암 구인회(진주시) 선생이 태어났다’는 것을.
Y자형의 구름다리 세 갈래는 세 명의 경제인 연상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또한 솥바위가 있는 ‘정암진(鼎巖津)’의 상형문자 솥 정(鼎)은 솥 다리가 3개라는 점도.
더 신비한 것은 ‘구름다리에서 동쪽 해 뜰 무렵 솥바위 쪽을 바라보고 기원하면 부자가 된다는 전설’이라는 대목에서 나그네는 눈이 번쩍 뜨였다. 대부유천(大富有天) 소부유근(小富有勤)이지 않은가. 그래도 이미 해는 떴지만 합장해 본다.

의령천의 가을 풍경과 오리배.
◇가을을 딛고 서서
구름다리에서 주탑을 올려다보며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발아래가 아찔하다. 그러나 의연하게 무릎을 꿇고 주탑과 출렁다리의 Y자 편대를 포인트로 앵글을 잡고, 구름다리 위에서 동서남북 만추의 파노라마를 담는다. 그리고 출렁이는 구간을 벗어나 주변을 조감하며 나그네는 언제쯤 어떤 빛깔의 단풍이 들까.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화들짝 놀라 정신이 들었다. 그렇지! 내 나이를 생각하니 이미 나는 인생의 가을을 딛고 서 있다. 돌아오는 다리 위에서 갑자기 출렁다리가 더 심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어느 한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던 날들이 있었을까. 흙수저의 인생은 처음부터 ‘흔들다리’다. 가는 길이 흔들다리면 인생의 중심축을 거기에 맞추어야 한다. 흔들흔들. 자칫 뻗대다간 추락이다. 단 한 번의 추락도 치명적인 건 말할 것도 없다. 성실하게 몸을 흔들며 뻗대지 않아야 한다. 그러다가 은수저와 대화라도 한다면 멀미가 난다. 흔들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흔들림이 갑자기 멈추니 멀미가 날 수밖에. 성실하게 흔들리다 보니 이제 조금은 평탄한 길로 들어선 기분이다. 혹시 멀미 날까 봐 걱정이긴 하지만.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들이 흔들리며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다가 의령천으로 날아들어 뱃놀이를 즐긴다. 저만치 능수버들도 늘어진 가지들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계절도 가을. 인생도 가을. 그렇지만 괜찮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어 피어나는, 두 번째 봄이다.”
알베르 카뮈의 말씀이 오늘 최고의 명언으로 와닿는다. 그렇지. 나는 가을이 아니라 두 번째 봄을 살고 있다. 그게 착각이어도 상관없다. 행복한 착각이니까.
도희주(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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