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11) 거제 둔덕기성
이 성을 올려다보니 고려 무신정변과 폐왕 의종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1500년 전 신라 때 우봉산 해발 326m에 첫 축조
1170년 정중부에 쫓겨난 의종 3년간 거제 유배
복위 꿈꾸며 성곽 다시 쌓고 집수지 등 만들어
삼국시대 신라부터 고려·조선시대 유물 출토
2010년 사적 제509호로 지정된 둔덕기성은 거제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으로 알려진다. 2004년 발굴조사 결과 신라시대에 처음 축조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수리하여 보강한 성으로 밝혀졌다. 전쟁과 방어를 위한 성이라기보다는 삼국시대 때 거제의 지명인 상군(裳郡)을 다스리기 위한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어둡고 슬픈 이름 하나를 더 갖고 있다. 이른바 폐왕성(廢王城)이다. 성을 올려다보노라면 폐왕이 되어 이곳으로 추방된 의종과 무신정변 그림자가 겹쳐진다.

거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 ‘둔덕기성’. 신라시대에 처음 축조됐으며 고려시대에 수리·보강한 성이다./김홍섭 소설가/

◇문관들의 조롱거리가 된 무관들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문신들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몰랐고 심지어 왕권마저 능멸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문관들은 무관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무관들은 문관들의 놀림감이었고 조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당시 무관들의 중심에 정중부가 있다. 일찍이 정중부는 나이 어린 문관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다. 궁중에서는 음력 섣달그믐날 밤에 마귀와 사신을 쫓기 위하여 베푸는 의식 나례(儺禮)가 시작된다. 잔치가 무르익을 즈음 술에 취한 김돈중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버린 일이 있었다. 정중부는 화가 나서 김돈중을 주먹으로 갈겨버렸다. 나이 어린 김돈중의 모욕에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인종에게 고해 정중부를 없애려 했지만 인종의 선처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때부터 정중부는 오랫동안 복수의 기회를 노렸지만 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왕조는 인종에서 의종으로 넘어온다. 놀기 좋아하는 의종은 허구한 날 문관들과 함께 연회를 벌였다. 무관들은 의종과 문관들의 눈치를 보면서 그들을 호위해 주고 술잔이나 얻어먹는 게 다반사였다.
의종 24년, 의종은 흥왕사로 행차한다. 많은 문관들이 뒤를 따랐다. 흥왕사에서 보현원으로 가는 도중 임금은 대가를 멈추고 즉흥적인 연회를 베풀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고 취흥이 무르익자 의종은 호위 무관들에게도 술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즉석에서 제안을 한다.
“너희들의 수박희(手搏戱) 솜씨를 보겠다. 이기는 자는 술이 석 잔, 지는 자는 한 잔이다.”
의종은 무관들에게 맨손 격투기인 수박희 경기를 시켰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 술 석 잔을 내리고 지는 자에게는 한 잔을 내렸다.
무관 가운데 이소응(李紹鷹)이란 대장군이 있었는데 이미 나이가 너무 많아 이제는 무술도 서툴고 체력도 쇠약했다. 이윽고 수박희가 시작되자 대장군 이소응은 새파란 문신 한뢰와 붙어서 지고 만다. 한뢰는 이소응 앞에 다가가 큰 소리로 욕하면서 뺨을 후려쳤다.
“못난 놈아! 무관이 문관도 못 이기면서 장수 행세를 하느냐!”
비록 술에 취해 한 짓이라고는 하지만 한뢰의 행동은 무관 전체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의종은 이를 나무라기는커녕 오히려 흥이 나서 좋아한 것이다. 심지어 이복기·임종식 등 문관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지독한 모욕에 무관들은 치를 떨었고, 그 자리에는 대장군 정중부(鄭仲夫)도 있었다. 마침내 정중부는 한뢰를 노려보며 외쳤다.
“한뢰 네 이놈! 이소응이 비록 무관이라 하나 벼슬이 3품인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모욕을 주느냐.”
술자리의 흥은 깨지고 말았다. 정중부의 가슴이 모욕감으로 끓어올랐다. 자신도 김돈중에게 수염을 태우는 모욕을 당한 일이 떠올랐다.

둔덕기성에서 내려다본 견내량 해협.
◇거제로 쫓겨 온 고려 의종
그날 저녁, 의종을 비롯한 신하들은 보현원으로 자리를 옮겨 여흥을 즐기려 했다. 의종의 행렬이 보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참다못한 이고와 이의방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이들은 왕명이라 속여 순검군사들을 한 곳에 불러 모으고 왕이 보현원 문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먼저 이복기와 임종식과 2명을 칼로 내리쳐 죽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좌승선 김돈중은 취한 척하며 말에서 미끄러지듯이 내려 도망치고 한뢰는 환관들의 도움을 받아 급히 의종이 있는 어상(御床) 밑으로 숨었다.
갑작스런 살육에 놀란 의종이 환관 왕광취로 하여금 이의방과 이고를 저지하려고 하자 정중부가 의종을 향해 다그쳤다.
“화근 덩어리 한뢰가 아직 임금 곁에 있으니 그의 목을 베도록 내보내 주십시오.”
겁에 질린 한뢰는 의종의 옷자락에 매달려 나오지 않다가 이고가 칼끝으로 협박하자 그제야 밖으로 나왔다. 한뢰가 나오자마자 이고는 단칼에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 광경을 본 김석재가 이의방에게 “이고 따위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뺄 수가 있느냐”고 따졌으나 이의방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치자 그 살벌한 목소리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랫동안 원한을 품고 거사를 마음먹었던 이들에게 의종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한뢰를 시작으로 승선 이세통, 내시 이당주, 어사잡단 김기신 등 문신들과 환관들이 줄지어 살해되고 거사에 동조하지 않은 무신들마저도 살해돼 보현원은 피바다를 이뤘다. 공포에 사로잡힌 의종은 무신들을 무마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정중부는 행궁을 맡고 이고와 이의방, 이소응은 곧 개경 궁궐로 달려가 “모든 문관들을 씨를 남기지 말고 죽여 없애라”고 소리치며 판이부사 허홍재를 비롯한 고급관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눈에 띄는 문관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야말로 보이는 대로 찔러죽이고 베어 죽이고 칼이 부러지면 때려죽였다.
의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날 밤에도 수문전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는데도 태연히 술을 마시는 광경을 본 이고가 왕을 죽이려 하는 것을 양숙이 제지하는 바람에 의종은 죽음을 모면했다. 그러나 대신 왕권을 내어놓아야 했다. 정중부는 그다음 날 의종을 거제로, 태자를 진도로 각각 추방시켜 버렸다. 놀기 좋아하고 문관들의 아첨에 영혼을 팔아버린 의종은 쓸쓸히 거제도로 쫓겨 와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 뒤에는 폐왕(廢王)이라는 쓸쓸한 명사 하나가 덧붙여진다. 패왕(覇王)과 폐왕(廢王). 글자 하나 차이가 가져오는 대립이 극명하다.
◇1500년 전에 첫 축조된 둔덕기성
둔덕기성은 경상남도 거제시 둔덕면 사등면의 경계지역에 있는 우봉산의 지봉(해발 326m)에 있다. 이 성이 발견된 것은 오래지 않았다. 그러나 축조시기가 워낙 오래된 성이라 거제지역에서는 최초로 지어진 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이곳은 서쪽으로 통영 및 견내량과 가깝고 북쪽에는 조선시대의 평지성인 오랑역이 위치하는 등 거제도 내에서는 교통상 주요 거점지이자 조망이 매우 양호한 지역이다. 2004년 동쪽 체성과 동문지, 2007년 집수지에 대한 시굴·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성곽의 축조시기 및 축조수법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초축성벽은 단면 L자 또는 계단상의 형태로 생토를 굴착한 후 판상(板狀)의 할석을 이용한 기저부 지정, 내탁부 조성, 외벽 면석의 다른 층 쌓기 수법, 외벽기저부의 보축성벽과 현문식(懸門式) 성문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원형 모양의 둔덕기성 집수지.

집수지 안내판.
원형의 집수지는 모두 3차에 걸친 사용시기가 확인된다. 바닥과 측벽부에 1m 두께로 점토를 발라 물이 빠지지 않도록 하고, 그 위를 석축으로 마감했다. 석축은 3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직경은 1.5m, 깊이는 3m 정도이며, 바닥은 점판암계의 판석을 깔고 측벽은 화강암석재를 다듬은 면석으로 깔끔하게 쌓았다.
성벽구간과 집수지 내에서는 토기와 기와류, 목기류, 자기, 금속기류 등 삼국시대 신라부터 고려·조선시대의 유물까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둔덕기성은 축성기법과 성내에서 출토되는 유물 등을 고려하여 7세기 후반에 신라에서 쌓은 성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삼각집선문이 시문된 단각고배라든가, 판상석재로 쌓은 체성벽과 원형 집수시설의 구축기법 등을 볼 때 6세기 말경으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가 보는 성은 무려 1500년 전에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에 방어용으로 투척하기 위해 모아둔 석환들.

석환군 안내판.
◇폐왕성과 견내량 그리고 전하도
둔덕기성에서 내려다보면 거제로 들어오는 좁은 해협인 견내량이 한눈에 든다. 필자가 보고 있는 견내량 바다의 이 아름다운 풍경을 의종도 보았을 것이다. 1170년 의종이 이곳에 왔으니 필자와는 854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같은 풍경을 보고 있는 셈이다. 의종 이후 422년 후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한산대첩의 영웅 충무공이 저 견내량을 누볐을 것이니 하나의 풍경 속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였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 뭉클해진다.
둔덕기 성은 평지에 축조된 성과는 달리 높다란 언덕 위에 세워졌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만한 좁은 길 하나가 언덕 바로 아래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길에서 올려다보면 너무 높고 길어서 시각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원래는 현문식 성문이기 때문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만 입성할 수 있는 특이한 구조다. 현재는 언덕을 돌아 걸어 올라갈 수 있다.
성내 집수지에는 물이 흘러들 길이 없는데도 물이 고여 있고,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에 방어용으로 투척하기 위해 모아둔 둥근 석환들이 한쪽에 보인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조선으로 바뀌면서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였다. 그래서 한때 거제도를 전하도(殿下渡)라 불렀다는 것이다. 폐왕이 된 임금과 그의 일족들이 줄줄이 유배된 곳을 ‘전하도’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전하(殿下)는 최상의 존칭으로 부르는 명칭이 아닌가.
성안에서는 역사의 그림자가 아직도 천 년을 넘어 어슬렁거리는데 성 밖 푸르른 견내량 바다에서는 배들이 분주히 드나들고 오늘의 삶이 바쁘게 굴러가고 있다.
김홍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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