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도희주의 반차 내고 떠나는 Trip in 경남] (11) 거제 매미성·팔랑포방파제·구천댐

주섬주섬, 추억 꺼낼 거제

기사입력 : 2025-01-02 21:27:59

겨울. 모든 것이 멈추는 계절. 나무는 잎을 모두 떨구고 나목으로 묵묵히 바람을 견딘다. 산속의 동물들은 겨울잠에 들고 들판을 파도치며 노래하던 풍요로운 생명들도 사라졌다. 들판의 풍요로운 곡식으로 배를 채우던 유충들도 땅속 침침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움직임들이 활기차다. 저수지에는 겨울 철새들이 화려한 날갯짓으로 한세상을 만끽한다. 겨울은 생명이 멈춘 계절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여행작가인 폴 서루(Paul Theroux)는, “겨울은 회복과 준비의 계절”이라고 했다. 정중동(靜中動). 추위쯤은 날려버리자. 차에 시동을 걸고 바다로, 호수로, 풍경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가자.

매미성
매미성


가덕해저터널·거가대교 지나
은빛 억새꽃 가득한 매미성 도착
태풍 매미로 무너진 밭 복구 위해
백순삼 옹 혼자 21년 째 쌓아

본래 지명 잃어가는 복항마을서
손에 닿을 듯한 섬 이수도와
옛 원형 갖춘 빨간 지붕의 집 발견
내려가는 길목엔 노거수 우뚝

◇혼자 손으로 쌓는 성(城), 설계도는 머릿속에= 가덕해저터널에 진입한다. 2004년 연말에 착공해 2010년 12월 13일 개통한 국내 최초의 침매터널이다. 그리고 당시 세계 최장의 거리(3.7㎞)였다. (현재 독일과 덴마크를 잇는 세계 최장 18㎞의 침매터널이 공사 중이며 2029년 완공 예정) ‘침매터널’이 개통됐을 때 기대와 우려로 처음 갔던 날이 떠올랐다. ‘해저터널’이니까 특수유리로 아쿠아리움처럼 바닷속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재난 영화처럼 상어 떼가 특수유리를 공격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했다. 터무니없었던 상상은 가끔 침매터널을 지날 때 통행료처럼 따라온다. 거가대교의 위상은 볼수록 놀랍다.

매미성 주차장 근처다. 은빛의 억새꽃들이 무리 지어 바람의 지휘에 노래하고 있다. 은빛 화음의 변주곡으로 서로의 어깨를 내주며 방문객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평일임에도 주차장은 반 이상 승용차들이 주차돼 있다. 주말엔 관광버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저 멀리 길게 뻗은 ‘거가대교’의 날렵한 이미지가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를 반으로 가른다.

거가대교.
거가대교.

‘매미성’으로 가는 길을 굳이 몰라도 앞서가는 사람들의 행렬이라든지, 골목 초입부터 늘어선 관광지 특유의 음식점들이 길을 안내하고 있다. 오래된 골목. 높은 건물이 없어서일까. 거제의 햇살이 골목에 납작하게 누워 있다. 늘어선 기념품 판매점에선 거제의 특산물들이 진열되어 있고 음식점에선 구수한 냄새가 바람에 흩날리며 저만치서부터 호객행위다.

앞서가는 관광객들은 익숙한 길인 듯 곧장 ‘매미성’으로 향한다. 그러나 나그네는 첫 번째 꺾어지는 골목 앞에서 어떤 끌림이 있었다. 그쪽으로 접어드는데 맞은편 상점 주인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매미성은 그쪽이 아임미더. 이쪽으로 가이소.” 돌아서 미소와 함께 가볍게 인사했다. 그리고 가던 길을 걸었다. ‘매미성’이 동네를 일컫는 고유명사가 되며 본래 지명을 잃어가는 ‘복항(洑項)마을’에서 그나마 옛 원형을 갖추고 있는 집을 발견했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돼 보인다. 바다 냄새와 바닷바람에 그을린 민낯의 집을 태양이 조명처럼 비추고 있다. 적막 그리고 쓸쓸함이 툇마루에서 졸고 있다. 이웃한 빨간 양철지붕 너머로 ‘이수도’가 손에 닿을 듯하다.

빨간 양철 지붕과 이수도.
빨간 양철 지붕과 이수도.

골목에서 나와 ‘매미성’으로 가는 내리막길. 가파른 내리막길이 자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이내 걸음을 멈춘다. 우측의 거대한 노거수가 대형 겨울 초상화처럼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좁은 지형이라 아름드리 노거수의 수형을 카메라에 온전하게 담기엔 한계가 있다. 나그네의 마음을 읽었을까. ‘길냥이’ 두 마리가 응수하듯 자리를 비켜준다.

‘매미성’은 자연재해의 낭패에 한 개인이 맨손으로 억척같이 쌓아 올린 세계 유일의 성채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 이후 지금도 매미성의 증·개축은 현재 진행형이다. 곳곳이 오밀조밀하며 판타지 영화 오픈세트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다. 곳곳마다 포토존이다. 관광객들이 인증 샷으로 분주하다. 건축에 문외한인 백순삼 옹이 이렇다 할 설계도도 없이 오직 주변과 ‘조화’를 가늠하며 세월과 함께 쌓아가는 성(城). 이색적인 스토리텔링에 해외에서도 찾아오는 경남의 랜드마크로 부상하고 있다.

바다와 매미성의 1차 경계선인 계단엔 몽돌로 쌓은 소원 탑들이 즐비하다. 연인이든, 가족이든, 매미성을 찾은 사람들이 재미로 또는 간절한 소망으로 한 층씩 쌓아 올리지 않았을까. 어느 날, 폭풍이나 해일이 작은 탑들을 무너뜨려도 또 다른 이들이 새로운 몽돌 탑을 쌓을 것이다.

팔랑포방파제
팔랑포방파제

낚시인 많이 찾는 팔랑포방파제
임진왜란 당시 왜군 8명 은둔
사고 우려로 통제됐다 재개방
찰박거리는 바다 ‘한 폭의 그림’

◇팔랑포방파제가 문을 열었다= 옥포 바다엔 대형 크루즈가 정박해 있고 선적을 기다리는 컨테이너들이 빌딩 숲을 능가한다. 아찔해 보이는 대형 크레인들은 허공의 무게와 부피를 재고 있다. 길 건너 반대편 상업지와 주거지는 거제의 ‘강남’이다. 솟아오른 마천루로 하늘이 낮다. 우리나라 조선소의 중추인 옥포조선소의 저력을 마주한다.

‘팔랑포방파제’로 간다. 낚시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방파제라고 한다. 본디 지명이 ‘파랑포(波浪浦)’인데 ‘팔랑포’라는 지명을 병용하고 있다. 계절풍으로 파도가 달라 ‘팔랑’이라 하고, 임진왜란 때 왜군 8명이 은둔했다고도 한다.

1978년 완공된 팔랑포방파제는 385m 남짓 중형 방파제이며 외항은 테트라포드, 내항은 석축으로 축조됐다. 한때 인명사고 우려로 출입을 통제했으나 지역민들과 낚시꾼들의 거듭되는 민원에 지난해 10월부터 개방하고 있다.

‘옥포대첩기념공원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초라한 계단에 비해 풍경은 그림 같다. 해안선을 따라 바닷물이 찰박거리며 몽돌들과 숨바꼭질하고 있다. ‘그림’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팔랑포방파제다. 입구에서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잠깐 사진 몇 컷만 찍겠다며 양해를 얻었으나 등대 쪽으로 가는 건 허용하지 않았다. 등대 방면으로 낚시꾼 몇이 수중의 어종들과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그 모든 움직임과 풍경이 역광에 실루엣으로 뜨고 잠시 나그네는 ‘장주의 꿈’같은 흑백의 환상에 빠져든다. 맹자의 〈제물론〉편 ‘호접몽’에서 장주는 잠깐 꾼 꿈속에서 나비가 된 꿈을 꾼다. 장원을 날던 나비는 꽃 위에 앉아 잠이 드는데 자신이 장주가 되는 꿈을 꾼다. 꿈에서 깬 장주는 나비가 꿈인지 장주가 꿈인지 아리송하다. 우리네 인생이 저쪽에서 꾸는 꿈이라면? 부랴부랴 환상에서 빠져나와 갈 길을 재촉한다. 

구천댐
구천댐

자연이 빚은 ‘댐 속의 섬’ 구천댐
아홉 마리 용 모여 ‘구천계곡’ 불러
용틀임 연상케 하는 지형 특성상
댐 전체 렌즈 담을 수 없어 아쉬워

◇구천댐 전망대에서 걸작을 만나다= ‘구천댐’으로 간다. 거제 계룡산(569.8m) 줄기에 아홉 마리의 용이 서리서리 모인 곳이라 하여 구천계곡이라 부르는데, 천혜의 자연경관이 700리 해안선과 어우러져 있다는 곳.

구천댐의 지형은 용틀임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일까. 거제중앙로는 꼬불꼬불한 곡선 구간이며 편도 1차로다. 주변엔 주차 공간이 거의 없다. 다만, 사고 시 대피할 수 ‘갓길’이 몇 곳 있을 뿐이다. 내비게이션에 주소지 ‘거제시 동부면 구천리 산1-2(구천댐)’를 설정하고 가지만 찾기 쉬운 곳은 아니다.

나그네 역시 내비게이션에 눈독을 들이고 갔으나 두 번이나 허탕을 쳤다. 같은 길을 두 번 오가며 겨우 전망대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상습결빙구간’을 알리는 노면의 갈색 구간 근처. ‘동부면’ 방향으로 주행한다면 왼쪽 기슭을 잘 살필 일이다 ‘동부면’과 ‘상문동’ 이정표는 표지판 하나에 양면으로 표기돼 있으며 한국수자원공사(K-water)의 알림판도 있다. 그리고 100m 정도 전방에 전봇대가 있으며 ‘전망대’를 알리는 작은 안내판이 있다. 전봇대 옆 자투리 공간에 주차한다.

‘삼거동 지게길 1구간. 구천댐 포토존. 구천댐 전망대 가는 길’ 3단의 작은 표지판이 무척 반가웠다. 호젓한 숲길을 오른다. 발아래의 낙엽들이 바스락거린다. 근래 알음알음 입소문 타고 온 사람들의 발길이 만들어낸 소로다. 대략 300~400m 걸었을까. 나무 사이로 저만치 안전망이 드러났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멈출 수밖에 없는 곳. 댐 속의 섬. 구천댐의 백미다. 강원도 영월 한반도 모양의 섬이 축소된 딱 그 모습이다. 지형상 댐 전체를 카메라에 담을 수 없어 안타깝다. 댐이라는 인위적인 힘에 자연의 위력이 빚어낸 걸작이다.

다각으로 앵글을 맞춘다. 그러나 자연은 제 모습을 쉽사리 보여줄 수 없는 모양이다. 돌아서 나오는 길. 나뭇가지를 오르던 청설모와 눈이 마주쳤다. 고 작은 눈망울을 굴리며 나그네에게 물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어요?” 녀석의 순간을 포착해야 했다. 서둘러 앵글을 맞추는 사이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갈잎 한 장이 빙그르르 내려앉는다. 올려다보니 그 나무의 마지막 잎새였다.

구천댐의 잔상은 오랫동안 떠나지 않을 듯하다. 봄이면 새잎으로 푸르름을 더하겠지. 그리고 무성한 여름을 보내고 가을엔 오색 단풍과 반영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기다리겠지. 손끝이 시린 걸 그때야 느꼈다.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봄의 나뭇잎은 한층 더 푸르다’고 말한 이가 벤자민 프랭클린이었던가. 나목들은 추위 속에서 새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행 팁〉

매미성
매미성

-매미성 : 2003년 9월 역대급 태풍 ‘매미’ 때 바다 근처 2000㎡ 밭이 모두 쓸려나가고 토사가 무너져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주인은 혼자 성을 쌓는다. 끝을 모르는 이 작업은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아직도 진행형이다.

팔랑포방파제
팔랑포방파제

-팔랑포방파제 : 입구 산등성이엔 ‘거북등절리’ 협곡과 용암의 단면에서 수직으로 길게 뻗은 ‘주상절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안전시설이 없어 접근성이 어려운 데다 이른바 ‘물때’와 맞아야만 천혜의 절리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구천댐
구천댐

-구천댐 : 1984년부터 1987년에 산양천과 구천천의 물줄기를 담기 위해 댐을 조성했으며, 거제 중심부 동부면의 공업용수와 정수 과정을 거쳐 지역민들의 생활용수로도 활용한다. 댐이 만들어지고 수위가 상승하면서 곡선 구간에 자연적으로 생각지도 못한 풍광이 나타났다.

도희주(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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