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이달균의 경남 영화 촬영지 돋보기] (12) ‘곡성哭聲’-함양 병곡면 도천마을

함양서도 한 장면 한 장면… 잘 직조된 한 편의 코미디

기사입력 : 2025-01-09 21:17:30

조명탑 세워놓고 밤새 촬영
나홍진 만의 개성으로 연출
2016년 개봉… 수많은 화제



이 영화는 감독이 꾸민 한 편의 완벽한 코미디물이다.
영화 속에서 코미디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극장 밖에서
온갖 현학적 수사들을 생산한 기현상이 바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무시무시한 영화를 우리 마을에서 찍었다니= 오늘 찾아간 곳은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이다. 왜인가? 주 촬영지는 전라남도 곡성(谷城)이지만, 이곳에서도 여러 장면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마을은 빨치산 대장으로 유명한 하준수의 출생지다. 주인공 가족의 일상을 담은 집, 그 집 마당에서 박수무당이 굿을 하며 살을 날리는 장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처녀가 돌담 골목을 배경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장면 등을 이곳에서 찍었다. 이 장면들 역시 잠깐잠깐 나오지만 실은 2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곡성에서 찍다가 가끔 이곳에 찰영팀이 몰려와 3개의 조명탑을 세워놓고 밤을 지새며 촬영하기도 했다. 무당 일광이 살을 날리는 굿판 장면은 15분 롱테이크로 찍었는데 또 하나의 명장면으로 남았다.

권갑점 시인, 하춘식, 하신효 전·현 도천리 이장이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의 집 앞을 가리키며 촬영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이달균 시인/
권갑점 시인, 하춘식, 하신효 전·현 도천리 이장이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의 집 앞을 가리키며 촬영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이달균 시인/

설핏 눈이 온 길을 함양 지킴이 권갑점 시인이 동행해 주었고, 하춘식·하신효 전·현직 도천리 이장님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감독은 곡성에서 알맞은 집을 찾지 못하여 두루 살피며 다니던 중 과거 천석꾼 집이었던 이 댁을 선택했다고 한다. 물론 옛 정취를 간직한 골목도 한몫했다. 담을 허물고, 대문 기왓장을 새로 하고, 나무를 갖다 심는 등 상황에 맞게 변화를 주었다.

하춘식 이장은 “촬영 2년 동안 주민들은 불편했으나 불평하지도 않았어요. 제작팀도 그런 주민들의 인내를 이해하고, 마을에 발전기금을 내주었고, 어른들 식사대접도 해주는 등 서로를 챙겨가며 촬영했지요. 잠은 삼삼오오 읍내 모텔에서 자고, 밥은 밥차로 해결했어요. 영화를 보니 좀 무시무시해서 이런 영화를 이곳에서 찍었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지요. 찍을 땐 이런 영화인 줄은 몰랐거든요, 허허!”

영화 곡성을 촬영한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 골목.
영화 곡성을 촬영한 함양군 병곡면 도천마을 골목.

◇오컬트 영화에 대한 관심= 그렇다. 곡성(哭聲)과 곡성(谷城),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이 동음이의어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는 전남 곡성군 곡성읍 동산리에서 주로 촬영하였다. 그런데 정작 영화 제목은 ‘곡성(哭聲)’이다. 곡성에서 촬영한 ‘곡소리 나는 미스터리한 영화’라는 얘기인데, 이는 나홍진 감독의 고도의 트릭, 즉 관객과 감독 간의 은근한 게임과 같은 설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감독은 이 영화를 스스로 코미디라고 했다. 관객 입장에선 “이렇게 무서운 영화가 코미디라니!”하며 의아해한다. 양측이 다 맞다. 그러므로 차츰 알아가 보기로 하자.

2024년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破墓)’가 개봉되면서 오컬트(occult)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장감독은 이미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로 이 장르를 대표하는 연출가로 인정받았는데 이 영화로 인해 마니아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영화계에선 다소 낯선 장르처럼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이런 흐름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그렇다면 ‘파묘’ 이전의 오컬트 장르로 주목받은 영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가면 여러 영화들이 떠오른다. 대표적인 한국 영화로는 ‘여고괴담’ 시리즈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알 포인트’가 있고, 더 옛날로 거슬러 가면 1967년 작 ‘월하의 공동묘지’가 있다. 외국 영화로는 ‘엑소시스트’가 대표적이고, ‘오멘’ 시리즈와 일본의 ‘링’ 시리즈도 이에 버금갈 만큼 유명하다. 그러나 ‘파묘’ 이전의 것으로 대표할 만한 한국 영화는 ‘곡성’이 아닐까 싶다.

영화 ‘곡성’ 스틸컷
영화 ‘곡성’ 스틸컷

◇난해할수록 답은 간단하다= 2016년에 개봉한 나홍진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당시 수많은 화제를 쏟아 내었다.

한국 영화계에선 나름의 강한 개성을 드러내는 감독들이 있다. 김기덕의 의식적인 폭력성, 박찬욱의 문학성과 대중성과의 절묘한 결합, 홍상수의 찌질한 지식인의 이중성 드러내기, 봉준호의 유머 속에 내장된 시대적 진실 엿보기 등등 독특한 개성을 내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이에 비해 나홍진 감독은 관객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연출로 유명하다. 어떤 영화평론가는 ‘곡성’ 개봉 전에 “과연 관객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표하기도 했다. 실제 영화를 보기 전이나 보고 난 후에도 평론가의 글을 찾아 읽어야 할 만큼 난해하고 궁금증을 자아낸 영화임에 틀림없다. 재미있는 것은 스포일러에 화내지 않고 해설을 먼저 읽고 표를 사는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든 나홍진 감독은 앞서 말했듯 이 작품을 코미디 영화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영상이 연속적으로 나오고, 상징과 은유로 영상이 바뀌어 가는 이 영화가 코미디라니! 그래서 약간 거리를 두고 다시 보았다.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의외로 간단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명세 감독은 “영화 전체를 맥거핀(MacGuffin) 덩어리로 인식하면서 코미디로 봤다”고도 했다. 맥거핀이란 ‘뭔가 있을 것 같은데 사실 별거 없는’, 감독은 관객과 게임하듯, 그런 것을 노리고 만든 영화적 기법으로 이해하면 된다.

워낙 연기자들의 연기가 좋고 배경이 그럴듯하고 음악과 음향이 리얼했기에 우리는 모두 그런 것에 빨려 들어가 허구를 읽어내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 또한 감독이 의도한 것이며 우리는 그 미끼를 물고 충실히 따랐을 뿐이다. 줄거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굿과 샤머니즘적 요소들은 하나의 레토릭에 불과하다. 굳이 무당을 등장시킨 것 자체가 트릭을 위한 고도의 장치라 해도 무방하다.

감독은 그럴듯한 혼선을 주기 위해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을 등장시킨다.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시골 경찰 전종구(곽도원), 신들린 딸 효진(김환희), 진짜보다 더 무당 같은 박수무당 일광(황정민), 비밀스런 눈빛의 처녀 무명(천우희), 강렬한 핏빛 시선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일본인(쿠니무라 준), 야수성을 드러내는 맹견 등의 완벽한 몰입은 혼돈에 빠지게 한다. 이는 감독이 의도한 트릭이 빛을 발한 것이고, 관객들은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만다. 제일 첫 장면, 누가복음 24장 37~39절을 인용함으로써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대결처럼 꾸민다.

시선은 세 개의 방향으로 분산되어 나타난다. 하나는 마을을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악마이며 둘째는 악마에게서 마을을 지켜내고자 하는 선한 존재이며 셋째는 이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으로 구분된다. 악의 존재는 일본인과 무당 일광, 선한 존재자는 처녀 무명과 신부, 흔들리는 이는 주인공을 비롯한 대다수의 등장인물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단순한 구도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실제 많은 복선을 배치해 두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다. 무당 일광의 경우, 왼편 차선으로 운전한다든가 훈도시를 입고 있는 장면 등 일본의 영혼임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알고 보는 관객은 거의 없다. 그 부분에 방점을 찍고 보면 일광과 일본이 한편임을 금방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냉철히 바라보면 “아하! 일광은 한국 무당이 아니라 일본의 영혼을 가진 얼뜨기 굿쟁이구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해야 하는데, 우린 현란한 굿거리를 보면서 이를 놓치고 만다. 감독은 친절하게도 일찍 정체를 드러내 주었지만 우린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현혹에 빠지게 하는 연출력이다. 이렇듯 나홍진 감독은 관객과의 게임을 마지막까지 견지한다. 마을을 구하려는 무명 역시, 혼돈을 자아내기엔 충분하다. 그녀가 걸어 둔 시든 꽃, 항아리에서 죽은 까마귀가 등장하는 장면 등에서 우리는 무명이 선한 존재임을 알아차리긴 쉽지 않다.

그렇다. 시골 폐가, 전라도 곡성지역의 사투리, 무속과 기독교를 버무린 영화는 얼마나 낯선 것인가. 관객은 당연히 당황스럽다. 그리고 “이게 뭐지?” 하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하다. 선과 악은 극명한 두 축이지만, 실상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면 장면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일본인과 무당 일광이 외부에서 들어온 악마이고, 이상한 처녀와 신부가 선한 이들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이도록 연출했을 뿐이다. 무명이 악령 퇴치를 위해 걸어둔 꽃은 마을의 수호신인 천하대장군 같은 것인데, 이 시든 꽃은 강적인 악령과의 싸움에서 지친 피폐해진 영혼을 대신한다. 그러나 그 또한 보기 나름이다.

주인공 종구는 처음엔 이 마을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가졌으나 딸이 혼수상태에 빠지고 기현상을 겪게 되면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무성한 소문, 알 수 없는 기괴함이 뒤덮은 마을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런 그에게 무명은 “내 말을 믿어라, 흔들리지 마라, 나를 믿지 않고 흔들린다면 가족들은 다 죽는다.”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무당 일광은 “그녀를 믿어서는 안 된다. 다 죽는다.”라고 말한다. 이런 상태라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무명은 내 말이 진실이니 의심하지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믿어라,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말한다. 그러나 속세의 평범한 한 사람인 종구는 일광을 용한 무당이라 믿으며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결딴난 집안을 목격하게 된다.

무명은 종구에게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집에 들어가지 마라.”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닭이 두 번 울자 집으로 들어가게 되고,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게 한다. 여기서 왜 닭이 세 번 울기 전이라 말하는가?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기독교적 상식이고, 무명이 선한 존재임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베드로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와 함께하리라 맹세했지만 결국 세 번 부인하였고, 나중에 그 나약함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악령의 힘 앞에 굴복하는 모습은 영화 속 종구만이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이다. 무명은 여기서도 “흔들리지 마라, 굴복하지 마라, 두려워 마라.”고 말한다.

영화 ‘곡성’ 스틸컷
영화 ‘곡성’ 스틸컷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 초월적 존재는 있는가?

감독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나는 이 영화에서 예사롭게 지나치지 말아야 할 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바로 흔들리지 않는 단 한 사람, 나이 든 신부다. 젊은 사제는 주인공의 말을 듣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사건의 중심을 비켜 가지만, 나이 든 신부는 흔들리지 않는다. 딸의 병을 보면서 신부를 찾아간 주인공에게 늙은 신부는 “의사를 믿어라.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라.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대수롭지 않은 장면으로 처리되었지만 분명, 이 영화에서 트릭 없는 한 마디는 이 장면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모두 제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산다. 진실이든 허구이든 그것을 믿으며 산다. 그래서 생은 정답이 없다. 종구를 비롯한 우리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기도 하고, 단체로 마취 혹은 최면에 걸려 살기도 한다. TV를 틀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치, 사회, 연예 기사들이 다 진실은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다. 곡성이란 마을에서도 죽는 자는 죽고 산 자는 산다.

극장 밖에서 이토록 치열하게 해설하고 각각 다른 주장을 드러낸 영화는 일찍이 없었다. 그런 설왕설래를 보면서 나홍진 감독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감독이 꾸민 한 편의 완벽한 코미디물이다. 영화 속에서 코미디를 그린 것이 아니라 극장 밖에서 온갖 현학적 수사들을 생산한 기현상이 바로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감독이 던진 미끼를 문 관객들의 허구에 찬 온갖 말들의 성찬, 코미디는 이런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영화는 기괴하고 혼돈스러우며 심오하다. 소재나 접근 방식이 다를 뿐 아니라, 이야기 구조와 결론이 열려 있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누가 이 영화에 대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으랴. 언뜻언뜻 드러나는 초월적 존재는 있긴 한 것인가? 나홍진 감독은 집요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추격자’가 그랬고 ‘황해’가 그랬다. 촬영팀이나 배우들의 고생이 눈에 선하다. 관객을 그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힘 또한 여전하다. 감독은 ‘황해’를 끝내고 나서 너무 힘들어서 코미디를 찍고 싶어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한다. 감독이 코미디라면 믿어야 한다. 그 말을 믿을까 말까 하며 왈가왈부하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코미디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믿고 말자, 이 영화는 잘 직조된 한 편의 코미디다.

이달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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