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12) 창녕 만년교·연지못

층층이 쌓은 무지개다리, 보름달이 되다

기사입력 : 2025-01-16 21:37:31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지만, 그 초현실적 모양과 아름다움은 인류에게 다양한 영감을 준다. 인류 역사 속에서 무지개는 신화, 전설, 예술, 문화의 영역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희망, 평화, 행복의 상징이 됐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교로서 다채로운 의미를 담는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비와 천둥의 신 토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 세상을 지배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여신 아이리스는 신들의 전령으로 무지개를 건너 신과 인간을 연결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에서는 무지개다리가 현실과 피안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로 인식됐었다. 오늘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 무지개다리의 전형, 영산만년교를 만난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돌다리인 창녕 만년교. 다리 아래가 반원형인 전형적인 무지개다리 모습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돌다리인 창녕 만년교. 다리 아래가 반원형인 전형적인 무지개다리 모습을 가지고 있다.
벼루 모양의 창녕 연지못.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것을 1889년 신관조 현감이 개울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
벼루 모양의 창녕 연지못. 오랫동안 방치돼 있던 것을 1889년 신관조 현감이 개울물을 끌어들여 만들었다.

◇국가문화유산 만년교= 창녕군 영산면 동리 433에 있는 만년교는 조선 후기에 축조된 돌다리다. 다리 아래가 반원형인 전형적 무지개다리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위쪽은 눈썹처럼 살짝 휘어 있고, 다리 아랫부분은 원을 반으로 가른 듯 정확하게 반원형이다. 그 모양이 수면에 반영되면서 온전히 둥근 보름달 모양을 만들어낸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아주 커다란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기분이 묘하다. 네팔 부드나트 사원(Boudhanath Stupa)의 벽에 그려진 부처의 ‘지혜의 눈’을 옮겨 온 듯하다. 이 앞에서는 자세를 흐트러뜨리면 안 될 것 같다.

1780년 창건된 영산의 무지개다리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만년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이 다리는 남산(南山)인 함박산(咸朴山)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에 놓인 다리라고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하며, 다리를 놓은 고을 원님의 공덕을 기리고자 ‘원다리’라고도 부른다. 1972년 보물로 지정됐다.

현재의 만년교 자리에 있던 원래의 다리는 나무로 만든 다리였다고. 이 다리는 남쪽에서 영산고을로 들어오는 중요한 길인데 홍수 때마다 다리가 떠내려가 마을사람들이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결국 1780년(정조 4) 석공 백진기(白進己)가 돌을 쌓아 건축한 것이 처음이었다. 이때는 김윤관(金允寬) 등이 현감(縣監)의 명을 받아 재원을 마련하고 공사를 감독했다.

그러나 정축(丁丑)년에 큰 홍수가 발생해 또 무너졌고, 1892년(고종 29) 영산현감 신관조(申觀朝)가 석공 김내경(金乃敬)을 시켜 다시 쌓았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보수해왔지만 안전 문제가 제기되어 2005년에 정밀 진단을 실시한다. 그 결과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2009년부터 이듬해까지 해체 보수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때 수차례 보수하는 과정에서 둥글둥글한 강돌을 불안정하게 쌓아 올린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처음 축조 당시처럼 안정감 있는 크고 네모난 돌로 교체했다.

만년교는 실개천 양쪽에 있는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가공한 화강석을 정밀하게 다듬어 쌓아 반원의 무지개 모양을 형상화했는데, 돌과 돌 사이가 빈틈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위에는 네모나게 잘 손질한 무사석을 쌓은 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고르게 흙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야자매트를 깔고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웠다. 난간과 장식은 없으며 자연스럽게 휘어진 노면이 반원형의 홍예(무지개 모양)와 수면의 반영이 조화를 이루며 눈동자처럼 원형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만년교
만년교

◇우리나라 무지개다리= 홍예교(虹霓橋)로 불리기도 하는 우리나라의 무지개다리는 거의 대부분 사찰에서 축조한 것이다. 일전에도 이 지면을 빌려 잠깐 설명했지만, 좀 더 보충설명을 하자면, 징검다리나 섶다리 등 지형 극복을 위해 지어지던 원시적 교량이 시간이 흐르며 종교 정치 생활문화 쪽으로 필요에 따라 발전한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불교에서 다리를 놓는 일은 현세에 공덕을 쌓는 일로 여겨진다. 부자는 다리 건축비용을 내고 동원된 백성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삯을 받아 생활에 보탤 수 있었다. 그리고 고도의 건축기술을 요하는 무지개다리의 축조 기술자는 스님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 있는 대부분의 무지개다리는 사찰에 가면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무지개다리가 처음으로 축조된 것은 8세기경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칠보교, 그리고 연화교다. 그리고 창녕 영산만년교는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지닌 무지개다리로 순천 선암사 승선교(보물, 1963년 지정), 보성 벌교 홍교(보물, 1963년 지정), 여수 흥국사 홍교(보물, 1972년 지정) 등과 함께 조선 후기 무지개다리의 축조 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홍예교는 이후 궁궐에서도 많이 축조됐다. 이 중 조선 초기의 영제교와 대원군에 의하여 복원된 영제교는 2경간 아치교였으나 현재는 길이 13.3m, 너비 10.2m, 경간 2.9m의 단경간 홍예교로 남아 있다. 이 밖에도 1411년(태종 11)에 준공된 창덕궁의 금천교(錦川橋)는 길이 12.5m, 홍예교의 높이 1.4m, 너비 12.6m, 경간 2.5m의 2경간 홍예교이며, 1484년(성종 15)에 준공된 창경궁의 옥천교(玉川橋)는 길이 9.9m, 홍예교의 높이 1.4m, 너비 6.6m, 경간 1.9m의 2경간 홍예교로서 둘 다 현존하고 있다.

◇세계의 무지개다리= 기록에 따르면 무지개다리는 이미 서기전 4000년경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건설됐고, 바빌로니아·아시리아·인디아·중국 및 그리스에도 존재했다고 한다. 또한 그 유적의 일부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특히, 로마시대가 홍예교의 중흥기로 당시의 로마인들은 홍예교의 역학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한 뒤 다리 축조에 적용했다고 한다.

서기전 1세기말에 완성된 프랑스의 님에 있는 퐁 뒤 가르(pont du gard) 수로교는 길이 270m, 수면상의 높이 45m의 웅장한 모습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물론 수로교는 물 보급을 위해 지어진 다리라서 사람이 지나다닐 수는 없다.

세고비아(Segovia) 중심에 있는 이른바 ‘악마의 교’도 수로교로서 거친 절석을 그대로 쌓아 올린 길이 800m, 높이 34m의 홍예교이며, 그 밖에도 로마인들은 지중해 연안이나 알프스 지방에 많은 홍예교를 가설하여 그 일부가 아직도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로마의 멸망 후 중세의 교량은 근 1000여년을 두고 별로 큰 진보가 없었으나,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서 이주한 무어족(Moor族)과 중국인에 의하여 그 명맥이 유지됐다. 중세의 홍예교는 대개 12~20m 지간의 것이 많이 존재하지만, 점차로 더 긴 지간의 홍예교가 출현하게 됐다.

1188년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에서는 베네제에 의하여 론강에 22경간(徑間)의 홍예교가 완성되어 4경간이 현존하며, 지간은 31~34m다. 참고로 건축용어에서 경간이란 다리 교각과 교각 사이를 말하며 지간은 다리의 길이를 말한다. 1377년 이탈리아 테레소의 아다강교의 지간은 75.5m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일본에서 처음 홍예교가 건축된 것은 17세기초(1603) 에도(江戶)시대이며, 중국에서 현존하는 것으로는 7세기 초 이춘(李春)에 의해 완성된 지간 37.4m에 이르는 안제교(安濟橋)가 가장 대표적이다.

연지못 풍경
연지못 풍경
당시 모습을 재현해놓은 물레방아. 옛 사람들이 이곳에서 곡식을 찧었다.
당시 모습을 재현해놓은 물레방아. 옛 사람들이 이곳에서 곡식을 찧었다.

◇만년교 주변과 연지못= 영산만년교는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주변에 볼거리가 상당하다. 만년교 아래를 지나는 실개천은 바로 옆 연지못과 이어진다. 만년교를 지나 공원으로 조성된 안으로 들어가면 옛사람들이 이곳에서 물레방아를 이용하여 곡식을 찧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때의 물레방아를 재현해놓았다. 바로 곁엔 호국공원이 있다. 영산호국공원은 총 165만㎡의 면적을 가졌으며, 1982년 5월 31일에 전국 최초로 호국공원으로 조성됐다. 규모는 작아도 이곳은 3대 국란호국의 성지로서 임진왜란 호국 충혼탑, 3·1운동 봉화대 및 기념비, 그리고 6·25전쟁 영산지구 전적비와 영산현감 전제장군 충절사적비 비각이 있다, 화왕산전투는 홍의장군 곽재우와 영산의 현감이었던 전제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였으며,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왜군을 격퇴하고 왜군들의 진로를 차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충절사적비로 가는 입구의 가로수길 풍경과 비각의 팔작지붕의 기와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멋지게 어울린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역대 영산 현감비군 32기가 죽 늘어서 있다. 앞에 흐르는 실개천을 따라가면 연지못이다.

영산현감 전제장군 충절사적비 비각.
영산현감 전제장군 충절사적비 비각.
영산 현감 비군.
영산 현감 비군.

예부터 영산 고을의 진산인 영축산은 불덩어리의 형상을 띤 산이므로 고을에 화재가 자주 일어날 수 있다고 전해온다. 그래서 ‘불은 물로 다스린다’는 오행 사상을 받아들여 화재를 예방하고 농사에도 이로운 치수를 위해 벼루 모양의 못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연지(硯池)못이다. 오랫동안 방치했던 것을 1889년 신관조 현감이 다시 바닥을 파고 개울물을 끌어들여서 못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늘의 오성(五星)을 본떠 다섯 개의 섬을 만든다. 삼년 뒤 그중 큰 섬에 한 칸의 초가 정자를 세우고 중국의 유명한 항주 호수의 미정(眉亭)에 비겨 현판을 항미정(抗眉亭)이라 한 것이 최초의 정자다. 그 후 1920년대 두 칸 사각의 기와정자로 개축했다가 1971년 다시 육각정자로 크게 중건한 것이 지금 보고 있는 항미정이다.

연지못 따라 걸을 수 있는 나무데크.
연지못 따라 걸을 수 있는 나무데크.

만년교를 지나 나무데크로 된 길을 따라 연지못을 한 바퀴 돌아본다. 호국을 위한 전투와 백성들의 힘든 삶이 펼쳐졌던 시간들이 역사로 켜켜이 쌓인 장소를 뒤로하고 만년교를 넘어 연지못에 다다른다.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듯하다. 마치 신선이 은거하는 곳에 불쑥 잘못 들어온 듯하다. 섬들이 수면에 반영을 만들고, 고요한 정자는 구름을 등지고 있다. 못에는 물오리들이 자맥질을 하며 서로 느긋하게 어울린다. 이 황홀한 풍경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무지개다리를 건너 못 한가운데의 섬들과 정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여기가 바로 피안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홍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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