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김시탁의 전원산책] (12) 마산 봉암수원지
도심에 이런 水가… 호숫가 산책, 힐링의 상책
1930년대 팔용산 계곡에 지은 식수원, 친수공원 변신
1.5㎞ 둘레길 허리띠에 감긴 낭만 호수와 수변 정자
겨울 햇살 머금은 동양정·너른 마당 등 운치 뽐내
주변 상사바위엔 해병대 레펠 구조물도 고스란히

도심 속에 위치한 마산 봉암수원지. 사시사철 운치를 뽐내며 나그네들의 발길을 유혹한다./김시탁 시인/
도심 근처 접근성이 좋은 곳에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길이 평평하고 반듯하게 누워있어 아이들을 태운 유모차나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의 발길도 거뜬히 받아 주는 친수 공원 봉암수원지가 그곳이다.
그곳엔 자연 속에 빠져 일상을 내려놓고 쉬기 좋은 수변 정자가 있고 물속을 유영하는 비단잉어 떼를 볼 수 있다.
겨울 햇볕이 걸린 작은 숲속 도서관에 들러서 책이라도 펼치면 책장은 바람이 넘겨주고 글은 햇살이 읽지만 노래는 두루미나 왜가리가 불러준다.
그 노랫소리에 취해 걷는 1.5㎞의 둘레길 허리띠에 감긴 호수는 건조한 영혼을 축축이 적셔줄 희망의 젖줄 같다.

◇식수원이 유원지로 탈바꿈되다
1930년대 반룡산(지금의 팔용산) 계곡에 지은 봉암 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때 식수원으로 이용되다가 1984년 12월 마산권 지방 상수도 사업을 완공함으로써 폐쇄되었다. 수원지 폐쇄 후 주변 일대를 자연친화적인 탐방로와 휴게시설, 산책로 조성 및 데크로드 등 친수공간을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힐링스폿으로 자리 잡았다. 봉암수원지의 둘레는 약 1.5㎞로 길이 고르고 그늘져 있어 부담 없이 산책을 하며 경치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으며 어린이 놀이터를 비롯하여 세족장, 그리고 네 개의 운치 있는 정자와 숲 속도서관 등 다양한 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다. 봉암이란 지명은 팔용산 동쪽 남천 하구의 합포만 끝에 위치하여 마을 뒷산 봉우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앉아 봉관을 바라보는 형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봉암유원지 진입로.

해병대 교육장 벽암지 안내판과 레펠 구조물.
◇벽암지 해병대 이야기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진입로 초입에 들어서면 바로 숲에 갇힌 듯 도시가 자취를 감춘다. 우측으로는 잡목이 우거진 완만한 산자락이 이어지고 왼쪽 길 언덕 아래쪽으로는 수원지의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다. 계곡 건너편은 팔용산 자락의 가파른 암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거기서 잠시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이 바로 귀신 잡는 해병대 이야기다.
지형이 험악한 그곳이 한때 해병대 벽암지 교육대로 1966년 9월 15일 진해 교육기지사령부 상남훈련대 소속이 설치하여 1979년 3월까지 운영한 곳이라고 했다. 지금도 안내판이 설치된 주변과 팔용산 상사바위에 해병대가 세 줄타기 특수훈련을 하면서 묶었던 레펠 구조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현대식 안내판에는 증강 현실(AR) 작동 가이드를 통해 당시 해병대가 암벽 하강 훈련 시 레펠을 하는 유격훈련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자연친화적인 어린이 놀이터.
◇자연 친화적인 어린이 놀이터
초입 완만한 경사도를 지나서 대체로 평탄한 평지길로 약 1㎞쯤 오르면 자연 친화적인 어린이 놀이터가 있다. 케이블카놀이대(집라인)를 비롯 암벽 타기 등 다양한 놀이기구를 겸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자연 속에서 싱그러운 숲체험과 피톤치드를 마시며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어린이 놀이터 옆으로는 수원지 여수로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계곡물로 여름철에는 물에 손을 씻거나 발을 담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놀이터와 산책로를 연결한 나무다리는 편리하면서도 운치 있다. 놀이터 주변에는 쉬기 좋은 벤치와 정자가 설치되어 있어 아이들을 동반하여 소풍 오면 정자에서 김밥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 같았다. 계곡물로 떨어진 낙엽들이 떠내려갔다. 흐르는 물 사이로 햇살이 찢은 파란 손수건 같은 하늘이 구겨놓은 은박지처럼 눈부시게 흘러갔다.

여수로와 수원지 제방.

유수로 물이 흐르는 분수대.
◇여수로 계곡과 수원지 제방
계곡물이 흐르는 듯한 자연미를 살려 만들어 놓은 세족장은 많은 사람들의 피로를 씻게 해 줬을 테지만 비수기인 겨울철에는 맨발로 뒹굴던 낙엽이 햇살에 발을 씻고 있었다. 밴치나 쉼터 정자에는 제방에서 미끄러져 내린 바람이 펑퍼짐한 엉덩이를 잠시 걸쳐 쉬고 있었다.
수원지의 제방은 댐이 아니므로 대형수문이 없고 제방의 오른쪽 산자락과 연결되는 한쪽으로 유수로를 만들어 유수 능력 이상으로 물이 유입되었을 때 넘친 물이 자연적으로 흘러나가도록 했다. 제방 아래 계곡은 여수로를 타고 흘러내린 물로 분수대를 설치했다. 여름철 한때 이 분수대와 계곡에서 수십년 넘게 전국 세미누드 촬영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제방 중앙 바닥에 통수로를 점검하는 작은 녹색 문이 하나 있고 그 위에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가 한자로 적혀 있다. 제방은 석축 콘크리트구조로서 자연 유하식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당시의 축조 기술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9월 14일 문화재청으로부터 199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낭만적인 호수
세족장을 지나 제방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다. 유모차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세족장을 못 미쳐 완만하게 오를 수 있는 오솔길이 있는데 그쪽을 이용하면 된다. 어느 곳을 택하든 제방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왼쪽 제방을 지나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난 길 중 안전을 위하여 한 방향 걷기 규칙에 따라 오른쪽 길로 택하면 된다. 제방에 올라보면 봉암수원지의 위세가 한눈에 펼쳐지는데 쳐다만 봐도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도심 가까운 곳에서 자연경관이 빼어난 낭만적인 호수를 걸을 수 있다는 건 틀림없는 행운이다. 고여있는 물은 평화롭고 잔잔해서 동적이라기보다 정적이다. 물의 빛깔은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날씨와 시간에 따라 다르지만 심안을 가진 자의 각도에 따라서도 다르다. 수원지 주변의 나무는 젖줄 같은 수원을 향해 가지를 늘어뜨려 호수와 소통한다.

수변정자 봉수정.

비단잉어떼의 아름다운 유영.
◇설해교와 수변 정자 봉수정
수원지를 도는 둘레길은 물과 맞닿은 흙길에 야자 매트를 깔아 놓았는데 크게 경사가 없어 아이들을 동반하기에도 무방하다.
오솔길 같은 숲길을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다리가 설해교다. 설해교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물밑을 내려다보면 물속에 단풍 색깔의 비단잉어들이 군집을 이루며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속을 유영하는 그 모습이 생동적이면서 평화롭다. 바로 근접해 있는 수변 정자 봉수정은 2층 구조물로서 각층마다 바라보는 뷰가 다르다. 물과 가장 근접해 있는 봉수정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사진 찍기를 선호했다. 기억이란 메모리에 저장하기 좋은 추억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숲속도서관이 있는 겨울 햇살 동양정.
◇겨울 햇살 동양정과 너른 마당
설해교를 건너 월명교에 이르는 공간의 수목들을 보니 온통 벚나무들이고 철쭉을 비롯 산기슭에 진달래도 있어 봄에 오게 되면 장관을 이루겠다. 수심이 얕은 상류에는 버드나무가 무릎관절까지 담근 채 서 있었고 고사목의 모습도 눈에 띈다. 왜가리 한 마리가 고사목에 앉아 있다가 아이들이 물제비를 만들려고 돌을 던지자 날아갔다. 아. 아. 아. 아. 마이크 테스트소리처럼 소나무 숲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수원지 둘레길의 절반쯤 되는 시점에 너른 마당이 있고 널찍한 2층 정자가 있었는데 현판을 보니 동양정이라 적혀 있다. 동양정(冬陽亭)이라면 겨울 햇볕을 말하는 게 아닌가. 1층 한쪽으로 작은 숲 속 도서관이 있어 겨울 햇살이 그리운 사람들이 정자 안으로 들어와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각기 다른 모습으로 쉬고 있었다. 너른 광장에서는 배드민턴을 치거나 훌라우프를 돌리는 사람과 줄넘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중년 사내가 아랫배를 소나무 등치에 반복적으로 부딪히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애완견이 마구 짖어대자 애견주가 민망한지 얼른 목줄을 끌어당겨 자리를 떴다.
◇당신의 뱃살은 안녕하십니까?
동양정 오른쪽 소나무 숲 입구에 연령별로 뱃살 테스트 기구가 하나 설치되어 있다. 다섯 칸의 통로를 만들어 놓고 그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아주 단순한 구조다. 10대는 19㎝, 20대는 20㎝, 30대는 21㎝, 40대는 23㎝, 50대는 25㎝, 그다음 두 코스는 아무 표시가 없는데 한 코스는 ‘좌절 말고 운동하세요.’이고 마지막 코스는 ‘운동만이 살 길이다’라고 경고처럼 적혀 있는데 뱃속에 쌍둥이를 밴 출산 직전의 암멧돼지가 지나가도 여유 있을 만한 공간이다. 설령 이 통로를 마음만 빠져나가고 뱃살은 걸려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서 너무 실망해 소나무 가지에 목매달 필요는 없다. 마음이 빠져나갔다면 그다음은 몸도 따라갈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들르게 되면 망설임 없이 꼭 한 번 테스트를 해보길 권한다.
자기 연령대의 통로를 빠져나가지 못하면 수원지를 몇 바퀴 더 돌면 된다. 당장 되지 않으면 자주 들러 돌다 보면 언젠가는 목표물을 통과할 수 있다. 햇살이 쥐구멍을 드나들고 바람이 대숲을 마음대로 달리는 것도 다 뱃살을 뺐기 때문이다.

너른마당으로 가는 나무다리 운호교.
◇돌탑. 그리고 발동하는 시심(詩心)과의 동행
운호교 지나 조금 가면 수원지 물이 길과 거의 맞닿는 공간이 있다. 그곳에서 주로 물제비를 빚는데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필자가 찾은 날엔 아무도 물제비 빚는 사람이 없었다. 오십견만 아니면 아련한 추억을 소환해 물살을 찢어볼 만도 한데 아름답게 참았다. 물결에 떠내려온 부엽토들이 잔뜩 쌓여 있는 곳에 잠시 앉아 상상의 돌팔매질 대신 사진 몇 컷을 찍었다. 누가 쌓았는지 모를 돌탑과 돌탑이 만든 그림자를 찢으며 오리 떼가 노니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늘이 감은 돌탑은 말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다. 그 기다림은 약속된 대상이라기보다 약속되지 않은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응집된 그리움의 공통된 언어는 침묵이지만 그 침묵의 하중이 더러는 어떤 형태의 언어보다 무거울 때가 있다.
청정 숲길 사이사이 설치된 익숙한 시인들의 시구가 목판을 빠져나와 수원지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줄곧 필자와 동행했다. 윤동주의 서시가 앞서가면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이 돌탑에도 내려앉았다. 한용운의 두견새와 정지용의 산에서 온 새는 숲을 흔들며 울었다. 해가 지고 서산 그림자가 발을 씻기 위해 수원지로 내려오면 김소월의 자주 구름이 하늘에 걸린 채 수원지에 빠질지도 모른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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