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도희주의 반차 내고 떠나는 Trip in 경남] (12) 마산 해안도로 따라 겨울을 달린다
추워도 좋아 겨울 路맨스
입춘이 지났다. 남도에서 매화 소식이 전해 온다. 그러나 산야의 계절은 아직 시린 새벽이다. 이럴 땐 깨어있는 바다에 닿고 싶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고 눈앞에서는 잔잔한 파도가 갯바위와 수다 떠는 바다. 마산합포구 해안로는 작은 만과 곶을 따라 굽이굽이 바닷길이 겹친다. 한 굽이를 돌 때마다 각자 다른 풍경들이 펼쳐지며 눈이 호사한다. 역시 겨울은 바다가 제격. 입춘 지난 바다가 양식장 어부들의 부지런한 몸짓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콰이강의 다리’로 불리는 저도 연륙교. 이곳은 친구와 연인들의 즐겨찾는 명소다./도희주 동화작가/


제말장군 묘역 돌아보니 배산임수 ‘다구리’가 한눈에…
◇다구리 제말장군묘를 찾아서
구산·원전 방면 현동 2터널과 1터널을 지난다. 바다를 경계로 ‘해양관광로’ 회전교차로에서 우회전이다. 겨울이면 볼 수 있는 ‘산불조심’ 깃발 몇 개가 풍속과 풍향을 말해준다. 우측의 ‘군령삼거리버스정류장’은 텅 비어 오히려 눈길이 간다. 해안로 아래에선 파도 소리가 가볍게 들린다.
곶이 많은 바다. 해안도로가 휘어지고 펴지기를 반복한다. 코너링 때마다 바뀌는 풍경은 눈에 달고 핸들을 잡은 두 손은 긴장된다. 인생도 그렇다. 펴진다 싶으면 갑자기 굽어 힘들고, 힘들다 싶으면 조금 펴져 살짝 위안을 준다. 신이 다음 굽은 길에서 힘들 걸 알고 선심 쓰듯이.

제말장군묘에서 내려다본 다구리 마을과 바다.
도로변에 ‘제말장군묘’라는 작은 안내판이 있지만 식별하기 쉽지 않다. 관심을 가지고 천천히 지난다면 계단 옆 ‘다구대나무골버스정류장’ 안내판에 세로로 ‘제말장군 묘’ 표지를 볼 수 있다. 갓길에 잠시 주차한다. 역사에 문외한이라 ‘제말장군’은 금시초문이다. 다만 계단 위에서 보는 바다 풍경이 압권이라고 들었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른다. 묘역은 어느 정도 관리가 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봉분은 평범하다. 망주석이 좌우 상당한 거리를 두고 그사이에 석양(石羊) 한 쌍이 마주 보고 있다. 석양은 호랑이나 벽사보다 길상, 승천, 효를 상징한다고 한다. 비석엔 세월의 더께로 판독 불가의 비문이 있다.

제말장군 묘역.
제말(諸沫) 장군은 선조 25년 임진왜란(1592년) 때 그의 조카 제홍록과 경남 웅천 김해 의령과 경북 문경 현풍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승을 거두었지만 성주 전투에서 왜적을 토벌하다가 전사(1593년)했다. 사후, 조선 정조는 “제말의 싸운 공이 이충무공의 노량해전에 뒤지겠는가”라며 정승 벼슬과 충자공 시호를 내렸고 순조는 ‘충의공’ 시호를 내렸다. 그렇지만 벼슬이 무색하게 평범한 묘지다. ‘제말’은 고성 상한(상놈)의 신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운명처럼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일념으로 앞장섰다. 진주 촉석루 옆에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가 있으며 성주 충절사와 고성 운곡서원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새삼 ‘인사유명(人死留名)’을 곱씹어본다.
돌아보니 배산임수형의 ‘다구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구리는 ‘곶(구지)’이 많은 마을을 뜻한다. 눈 아래엔 무논과 손가락으로 꼽을 몇몇 가옥, 그리고 진동만의 죽도(竹島)가 합죽선처럼 활짝 펼쳐져 있다. 양식장 부표가 점점이 대열을 이루고 있다. 바닷바람을 타고 봄이 오는 신호처럼 섬들이 해무에 아슴푸레하다.
장구선착장서 섬 바라보니 나그네 가슴이 두둥실…

장구선착장 끝에서 바라본 섬들.
◇장구선착장에서 보는 섬. 섬. 섬
‘군령삼거리버스정류장’까지 빠져나와 해양관광로를 서행한다. ‘원전·내포·명주’ 이정표 아래 차를 세운다. 바다만큼 동적인 곳이 있을까. 양식장 굴 작업 선박들이 햇살에 역동적이다.
바다를 끼고 편도 1차로, 굽은 길을 돌 때마다 풍경맛집으로 눈이 호사한다. 혀를 충족시키는 맛집과 눈을 충족시키는 풍경, 그리고 귀를 충족시키는 파도 소리. 잠시 갓길에 정차한다. 겨울 바다에 손을 담가본다. 손이 시리지만 잔잔한 파도가 손가락들을 간질인다. 바다와 교감한다. 수면 아래 이미 다가온 봄이 나그네 손가락을 희롱하는 것 같다. 나그네 몸을 잠식한 도시의 독소가 손가락을 통해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수면 위에선 갈매기들이 씩씩하게 겨울 바다를 가른다.
내비게이션을 주시하며 로봇랜드 방면으로 몇 개의 터널을 지난다. 바다를 끼고 가는 길엔 때로는 잡목들이 빽빽하게, 때로는 듬성듬성 바다를 가리고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도로변으로 굴구이 전문점 간판이 줄지어 나타났다. 굴뚝에선 하얀 연기가 풀풀 솟고 주차장엔 차들이 거의 만차다. 겨울 구복리는 굴이 제철. 바로 옆 바다 양식장에서 바로 건져 올린 굴이 넓은 사각형 철판 위에 오르면 아래에선 장작이 뜨겁게 타오른다. 어떤 가게는 안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데 빈자리가 없다. 장작불에 뭉근히 잘 익은 뽀얀 속살의 굴 맛을 기억한다. 입 안에 간간하고 따끈한 바다가 출렁인다.
‘장구선착장’으로 가는 해안로다. ‘추락방지턱’이 파도와 같이 출렁이는 듯하다. 얼핏 보면 트램이 줄지어 달리는 듯하다. 선착장 규모에 비해 주차장이 꽤 넓다. 장구선착장 일대는 수산자원보호구역으로 바닷속이 훤히 보인다. 노을과 일몰이 일품인 어촌마을이며 낚시의 핫스폿이다. 초행길인 사람들을 위한 안내판이 상세하다. 징섬! 북섬! 장구섬! 작은닭섬! 바다에서 섬 몇 개가 둥실둥실 다가오는 착시에 화들짝 놀랐다. 섬 주변 굴 수확하는 선박들은 또 다른 섬이다.
배를 손질하는 주민과 마주쳤다. 엷은 미소로 목례했다. 한눈에 외지인임을 감지하곤 농을 건다. “저 섬들 모델료가 비싼데 공짜로 찍을라꼬요? 일몰이 억수로 멋진데 일몰도 찍으로 오소.” 그런데 일몰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

콰이강의 다리 옆 신교량.
장구선착장에서 불과 5~6분 거리에 저도연륙교가 있다. 가는 길엔 구복예술촌이 있는데 각종 문화 체험과 전시와 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저도연륙교는 저도와 마산합포구를 잇는 다리로 2017년 3월 28일 개장했다. 사람들은 ‘콰이강의 다리’라고 부른다. 2차 세계대전 배경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왔던 철도용 다리와 흡사해 닉네임처럼 불리고 있다. 2004년 나란히 건설된 신교량과 함께 이미 경남권의 명소로 많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초행길을 오갈 때 풍경을 온전하게 보긴 어렵다. 갈 때 못 본 풍경을 오는 길에 볼 수 있다면 행운이다. 나그네는 저도연륙교로 가면서 보지 못한 진풍경을 오는 길에 보는 행운이 따랐다. 간극의 차이일까. 무심코 바다에 던진 시선. 나무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섬. 정말 동그랗게 빚어놓은 듯했다. 징섬. 징처럼 중후한 울림에 가슴을 관통한다.
전설 품은 암자 108계단 올라보니 탁 트인 바다가 품안에…
◇장수암(將帥庵) 일주문의 준엄한 법문

장수암108계단에서 내려다본 남포만.
‘이순신로’를 달린다. 차창을 내리자 남포만의 찬바람과 쪽빛이 눈시울을 자극한다. 눈앞의 풍경은 비현실적일 만큼 이색적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장수암 쪽으로는 약간 오르막길이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펜션과 레스토랑이 있다. 최적화된 오션뷰.
오는 동안 터널을 많이 지났으나 지금, 가장 아름다운 나목의 터널을 마주한다. 확실하지 않지만, 벚나무일 듯하다. 머잖아 가지마다 점점이 자줏빛 망울들이 맺히면 한 번 더 와 보고 싶은 곳.
경남의 육지 최남단에 작은 암자가 있다는 데 놀랍다. 돌담을 끼고 올라 주차하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장수산의 장수암이다. 장수산 높이는 밝혀진 게 없다.
장수암은 신라시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중창과 보수를 거쳤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중창됐다고 한다.
일주문엔 장수산장수암(將帥山將帥庵) 편액이 있고 기둥 우측엔 ‘入此門內莫存知解(입차문내막존지해)’, 좌측엔 ‘無解空器大道盛滿(무해공기대도성만)’의 현판이 있다. 내용인즉, ‘이 문을 들어오거든 알음알이를 지니지 말라, 알음알이 없는 빈 그릇이라야 큰 깨달음을 이루리라’는 준엄한 법문이다. ‘알음알이’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어설프게 나서서 존재감을 드러내느니 차라리 침묵이 그나마 체면을 유지하는 방법임을 절감하는 요즘이다.
108계단 우측엔 소규모 자연장지가 있다. 계단을 오를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내려다보이는 바다도 점점 넓어진다. 장수암 일주문과 바다의 조화가 가히 압도적이다. 시야가 넓어지자 굴 양식장의 부표들이 해군들 해상 퍼레이드를 보는 듯하다. 계단 아래위에서 관광객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인증 숏을 담느라 분주하다.
장수암은 창건 전설이 있다. 옛날에 한 노인이 바닷가에서 기도하다가 흰 까마귀를 만났다. 까마귀가 노인에게 “이곳에 절을 지으면 많은 사람이 복을 받고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인은 까마귀의 말을 듣고 장수암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수암은 신라 33관음 중 하나인 ‘장수관음’의 도량이며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관음보살로, 장수암을 찾는 이들은 장수와 건강을 기원한다고 한다. 합장하는 사람들 옆에서 나그네도 합장한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기원하지 않았다. 가슴에 아름다운 겨울 바다를 담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한 하루였다.
☞제말장군묘: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 다구리 66-2에 소재. 비문은 자료에 의하면 ‘유명조선국 선무공신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지의금부사 행성주목사 시충장 제공지묘 (有明朝鮮國 宣武功臣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知義禁府事 行星州牧使 諡忠壯 諸公之墓)’임을 알게 됐다. 제말 장군은 제씨(諸氏) 문중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장구선착장=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구복리 189-9에 소재. 섬이 장구채를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선착장 겸 항구다. 어패류 채취는 개인별 구역이 있어 아무나 채취할 수 없다. 썰물 땐 ‘장구섬’이 갈라지는 바닷길을 볼 수 있으며 장구섬 탐험도 가능하다.
☞장수암: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 1길 14에 소재. 17세기 건립으로 추정되는 석탑(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23호)과 석등(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24호)이 있으며, 18세기 건립으로 추정되는 대웅전엔 지혜와 덕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도희주(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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