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23) ‘위생병’ 이지호씨
총 대신 압박붕대 들고… 핏빛으로 물든 전장 ‘종횡무진’
진주서 태어나 사범학교 다니며 교사 꿈꿔
전쟁통에 숨어 지내다 나라 위해 참전 결심
교회 목사 권유로 총 안 쏘는 위생병 지원
부산서 훈련받고 5사단 강원도 횡성 배치
전투하다 다친 전우 압박붕대로 응급치료
중공군 공세에 후퇴하다 포로로 붙잡혀
넉 달간 온갖 고초… 구사일생으로 탈출
1954년 제대 후 고향서 40년간 교사 생활
“그때의 기억 떠올리면서 혼자 웃고 울어
내 나라 지킨다는 목표 이뤄 행복한 삶”
“목사님, 기독교인이 전쟁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워도 됩니까? 나라를 구하러 가고 싶습니다.”
6·25전쟁 참전유공자인 이지호(93)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사범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참전을 결심했지만, 기독교인이 총을 들고 싸울 수 있는지 마음에 걸렸다.
위생병이 된 그는 총에 맞아 쓰러진 전우들을 치료하고 후송을 도왔다. 포로 생활을 할 때도 다친 전우들을 챙기며 같이 탈출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전우들을 대신해 전선으로 나갔을 만큼 용감했다.
2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동안 그는 쉬지 않고 증언을 이어갔다. 신문이 그의 이야기를 모두 전달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그는 매일 밤 죽을 뻔한 기억들, 전우들과 웃었던 때를 생각하며 잠든다.

이지호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중공군에 붙잡혀 6월 중순 강원도 금화 인근에서 탈출한 넉 달 동안의 포로 생활과 탈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교사를 꿈꾸던 소년, 전선으로= 그의 고향인 진주는 전쟁이 터지고 한 달여 뒤쯤 1950년 7월 말 인민군에게 함락된다. 그의 동네에도 인민군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들을 돕는 사람도 생겼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그의 집에도 인민군이 찾는다. 인민군은 왜 기독교를 믿는데 예배를 드리지 않냐고 물었다. 당시 그는 혹여나 인민군에게 징집될까 봐 방 안에 숨어 있었고, 그의 형이 “공산당이 기독교를 박해하는데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냐”고 답했다. 인민군은 “공산당도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예배를 드려라.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안심시켰다.
그의 가족과 기독교인들은 그 주 일요일부터 예배드리기로 했다. 예배 날짜 이틀 전인 금요일 아침. 미군 폭격기가 나타나더니 교회 일대를 폭격했다. 폭격이 정확히 교회 종탑에 떨어져 교회는 한순간에 불타 없어졌다. 그는 울면서 교회로 달려갔고, 결국 예배를 다시 드리지 못하게 됐다. 며칠 뒤 인민군이 교회에 모인 기독교인들을 총살하기 위해 예배를 재개하라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마터면 그와 수많은 기독교인이 몰살당할 뻔했다.
추석이 지나고 미군과 국군이 다시 진주를 탈환했고, 산속에 숨어 지냈던 그와 가족들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보며 국민이라면 참전해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총을 들고 싸우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컸다. 그는 다니는 교회 목사를 찾아 이런 고민을 말했고, 답을 기다렸다.
“며칠 뒤 목사님께서 제3 육군병원 위생병 모집이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권유했죠. 아무래도 위생병은 직접적으로 총과 칼을 들지 않으니, 저에게 맞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평생 진주에만 있었던 촌놈이 전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입대를 한 거죠.” 그렇게 교사를 목표로 사범학교에 다니던 학생이 군인이 된다.

이지호 6·25 참전유공자가 1954년 복무 중 전우들과 찍은 사진(오른쪽 아래)./김승권 기자/

이지호 6·25 참전유공자가 1954년 복무 중 전우들과 찍은 사진./김승권 기자/
◇“위생병! 위생병! 나 좀 살려줘”= 8월 입대한 그는 부산 토성국민학교에서 기초 훈련을 받고, 대구에서 실탄 사격을 한 뒤 서울행 기차에 올라탔다. 서울에 도착해 이화여자고등학교 강당에 집합했다. 5사단 35연대 2대대 위생병으로 배치받은 그는 다시 강원도 횡성으로 이동한다.
그는 위생병이었지만 따로 훈련을 받지는 못했다. 위생병에게는 소총이 지급되지 않았다. 무기는 수류탄 두 개가 전부였다. 치료할 수 있는 의료품도 피를 멈추게 하는 압박대뿐이었다. 그의 임무는 총에 맞은 전우를 압박대로 응급 치료하고, 의무대로 후송하는 것이었다.
그가 횡성에 도착한 날, 심한 전투가 벌어져 기관총과 포탄 소리가 크게 났다. 전투를 처음 본 신병들은 쓰러지거나 뒤로 도망치기도 해 장교들이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는 전선 뒤 대대 의무대로 배치돼 큰 전투를 피할 수 있었다. 같이 입대한 전우들은 전선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보고 다시 전투에 참전하지 않겠다며 겁을 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전우들을 대신해 전선에 가겠다고 했다.
전투 중 전우 한 명이 인민군 총에 맞고 쓰러졌다. 치료하기 위해 그는 달려갔고, 전우는 등에 총을 맞아 상처가 컸고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다. 지혈하고 그를 고지에서 내려오게 하려 했지만, 전우는 절대 안 간다고 했다.
“총을 맞아 곧 죽을 것 같은 전우가 적진으로 달려가겠다고 소리친 게 잊히지 않아요. 그만큼 군인들이 책임감이 강하고 애국심이 컸어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이지호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중공군에 붙잡혀 6월 중순 강원도 금화 인근에서 탈출한 넉 달 동안의 포로 생활과 탈출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넉 달간 포로 생활= 중공군이 대대적으로 참전하면서 1951년 1월 그의 부대는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까지 후퇴한다. 재정비 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벌인다.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이었지만 개인 장비가 적어 기동성이 뛰어났다. 반면 국군은 공격 작전 중이라 횡성에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51년 2월 11일 밤 중공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또 국군 방어선이 약하다는 점을 노려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국군은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만에 완전히 포위됐다.
그는 후퇴 중 한 빈집에서 전우들과 잠을 자고 있다가 중공군들에게 붙잡혔다. 그의 부대원 수십 명이 포로가 됐고, 중공군은 이들을 인민군에 인계했다.
포로들은 일정한 수용소가 없어 날마다 이동하며 지냈다. 낮에는 빈집에서 잠을 청하고 밤에 움직였다. 포로 생활은 비참했는데 그는 넉 달 동안 제대로 된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밥을 먹으면 돌 씹는 소리가 났다.
어느 날 인민군 장교가 포로들에게 “중국해방군동무(중공군) 후송을 도와야 하니 나와라”고 했다. 그는 다행히 가지 않았지만 따라 나선 전우 수십 명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7명뿐이었다. 인민군은 수시로 포로들을 포섭해 전향하도록 했다. 포로들을 집합시켜 놓고 “당을 위해 군 복무하지 못할 동무는 손을 들라”고 했다. 그는 당당히 손을 들었다. 방금까지 포로들에게 ‘해방전선 동무’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한 인민군들은 그를 걷어차며 욕했다.
“포로 생활 동안 사상 교육을 받고 인민군 노래 부르고 했어요. 전 입만 따라 했지 실제로 부르지는 않았어요. 끝까지 대한민국 군인이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하면 인민군들이 저를 왜 안 죽였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이지호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2월 강원도 횡성에서 중공군에 붙잡혀 6월 중순 강원도 금화 인근에서 탈출한 넉 달 동안의 포로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는 6월 중순 강원도 금화 인근에서 탈출했다. 인민군들이 포로 관리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전우들과 같이 도망쳤다. 탈출 과정 속에서 한 여인의 도움을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포로가 된 국군들을 불쌍히 여겨 밥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했다. 유엔군이 근처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가 떠날 준비를 하자 그녀는 쌀 한 주먹을 내밀며 꼭 살라고 전했다. 그는 ‘USA’가 적힌 본인이 입던 옷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미군이 점령하면 그 옷을 보여줘 같은 편이라고 이야기하라는 뜻이었다.
그와 전우는 유엔군 진영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아군 진영에 들어가니 튀르키예(옛 터키) 군인들이 “Are you communist(너 공산주의자이니?)”라고 물으며 초콜릿을 나눠줬다.
“살아 돌아온 게 기적이죠. 탈출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온몸에 이가 득실거렸고, 이발하지 못해 장발이었죠. 누가 우리를 군인이라고 봤겠습니까. 탈출에 성공했던 날은 지금도 생생해요.”
그는 조사를 받은 뒤 병기병, 행정병을 거친 뒤 1954년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제대 후 그는 진주로 돌아와 사범학교에 복학했고,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40년 넘게 했다.

참전유공자가 1954년 받은 제대증서./김승권 기자/
그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전쟁 경험을 매일 밤 생각하며 잠에 든다. “그때의 기억을 생각하면 혼자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요. 참혹한 것을 자주 봤지만, 내 나라를 지킨다는 목표는 이뤘으니 전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절대 불행하지 않아요.”
그와 헤어진 뒤 취재 차량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러자 그가 슬리퍼 차림으로 다시 달려 나와 음료수를 건네며 말했다. “나와 약속 하나 합시다. 꼭 진주에 오면 다시 들러주세요. 고마웠습니다. 충성!”

이지호 6·25 참전유공자가 진주시 자택에서 인터뷰를 마친 후 취재진을 배웅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