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간이역] 즐거운 편지-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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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이 시는 시인에 의하면, “고등학교 삼학년 초중반에 씌어져서 졸업 무렵 받은 교지에 실렸던 작품”이다. 1950년대 황무지 서울에서 엘리엇 흉내를 내던 학생은 우리 시에 모더니즘 대신 전통을 찾는다. 소월과 만해를 거쳐, 〈동서양 틈새에서 글쓰기〉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모더니즘 습작들을 다 태워버리고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연상의 여자에 대한 짝사랑에서 해결책이 나왔다. 고3 때 씌어진 〈즐거운 편지〉가 한 예인데, 전통적 서정시의 흐름을 따르면서도 지금 볼 때 실존주의적인 정신이 수혈된 작품이다.” 애인이 떠나갈 때 한없이 기다리는 전통 연애시에서 벗어나 “내 사랑도 어디쯤에서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같은 강한 의지는 사랑을 비롯한 모든 본질이 삶의 선택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정신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그가 〈기다림의 미학〉에서 “어쩌면 기다림-소망이야말로 오늘날 그 무엇보다도 인간을 그나마 인간으로 있게 하는 요소”라고 말할 때, 다른 글에서 그에게 “그 손위 여자들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나이를 별로 먹지 않고 나보다 훨씬 젊은 여자들로 살아 있”다는 고백에 이르게 한다. 사랑의 부재가 그에게 사랑을 살게 한 것이리라.
정남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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