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시론] 화교라는 존재- 조정우(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중국음식은 한국의 대표적인 외식 문화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에게는 좀 이상한 표현으로 보이겠지만 ‘중국집에 간다’는 것은 외식을 하러 중국 식당에 간다는 의미이다. ‘중국집’ 중에 상당수는 한국인 주인이나 요리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지만, 화교들이 경영을 하고 있는 곳도 꽤 있다. 화교 중국 음식점들에 가보면 화교 상인을 뜻하는 ‘화상(華商)’이라는 문구가 내걸려 있다. 현관에 크게 화상 음식점임을 내건 곳도 있고, 내부에 조그맣게 표기를 한 곳도 있다. 이렇게 ‘화상’ 임을 강조하는 것은 화교들이 직접 운영을 하는 곳이므로 중국 본토의 맛을 볼 수 있다는 점을 광고하는 셈이다.
한국에서 화교의 역사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의 군사들이 주둔하게 되면서 중국인 상인들도 함께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면서 중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일부는 귀국하지 않고 전국 곳곳에 정착을 하였다. 이들이 근대 한국 화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을 꾀한 화교들이 주로 종사한 업종이 바로 요릿집이었다. 외식 문화가 없던 우리에게 ‘청요릿집’이라고 불린 중국 음식점들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런데 이 화상 중화요리점들은 식당만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 요리는 돼지고기와 야채류를 많이 필요로 했는데 한국 현지에서는 이를 충분히 조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화교들은 돼지와 야채를 직영 경작하는 농장을 만들어 중화요리점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재력이 있는 화상들은 음식점과 농장을 함께 경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국 화교들은 주로 중국 산동(山東) 지역 출신들이 많은데, 이 산동 지역은 배추를 비롯한 야채의 세계적 산지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배추의 상당수는 이 화교들이 도입한 산동산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중화 요릿집을 거점으로 정착한 화교들은 본국과의 교역망을 기반으로 상업에 주로 종사하면서 한국의 지역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지금도 웬만큼 규모 있는 도시에 가면 언제나 화상 중국집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중 일부는 크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기도 했는데, 한국에서는 이를 질시하여 돈에 철저한 중국인이라는 의미를 담은 ‘왕서방’을 화교의 표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사실 화교들의 부는 화교 개인의 노력이나 특성보다는 이들의 모국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였다는 데에 있었다. 화교들은 모국과의 강한 연계 속에서 교역을 중심으로 부를 축적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지금도 화교들이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바로 모국이 세계의 공장이자 G2 국가인 중국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에 비해 한국에서 화교들의 경제력이 약한 것은 냉전 시기에 한국과 중국의 연계가 단절된 데 기인한다. 즉 화교들의 기반은 모국과의 정치적·경제적 네트워크에 있는데, 이것이 끊어져 버렸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 화교들은 정치적 연계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의 우방인 대만 국적을 선택하였다. 한국 화교들은 대부분 산동을 비롯한 중국의 본토 대륙 출신으로 대만에 아무런 연고도 없고 심지어 가본 적도 없었지만 기꺼이 대만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만 국민당 정부는 국적을 부여하는 것 이외 한국 화교들에 대해 별다른 보호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한국 정부대로 이들을 외국인으로 간주하고 부동산 소유의 제한, 경영 업종 제한 등 차별 조치를 강화하였다. 한국의 화상 중국집들이 한동안 숨겨오다 최근에야 ‘화상’ 임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차별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국적이나 정체성을 묻는 것이 결코 흔쾌한 질문이 아닌 것은 이러한 역사에 한국인들도 함께 연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정우(경남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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