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경남 독립의 역사와 더 큰 미래로] ⑤ 양산농민조합 ‘신영업 선생’
“소작료 내려라” 투쟁한 소작농… 두 동생도 독립운동가
지난 3·1절에 독립 유공자로 96명이 서훈을 받았다.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는 18명(부산·울산 포함)으로, 전국 최다 인원이다. 이 중 양산에서만 11명이 선정됐다. 이번에 서훈을 받은 신영업 선생의 삶은 마치 영화 같다. 그의 동생들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첫째 동생 신학업 선생은 서훈이 됐지만, 신영업 선생은 이제서야 인정받았다. 아직 막냇동생은 유공자가 되지 못한 현실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했지만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학살당했다.
정확히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몰라 묘소도 없다. 비참한 근현대사를 닮은 듯한 그의 삶을 양산 현지에서 되돌아봤다.

양산시 교동의 양산시립독립기념관 외부에 양산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이 붙어 있다./김승권 기자/
독립운동 이끈 삼형제
신간회·농민회·기자 등 활동
농민조합 조직 결성 후 구금
보도연맹 가입 후 학살당해
두 동생도 청년운동 등 참여
◇일제 수탈 맞선 양산 소작농들= “어제 농사짓던 인물이 오늘은 독립군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야.” 영화 ‘봉오동 전투’ 속 대사이다. 1932년 양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32년 3월 16일 양산농민조합 소속 조합원 수백 명은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정기대회를 연 뒤,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며 시위를 펼쳤다. 양산농민조합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1931년 4월 결성됐다.
이들은 그해 10월 일본·한국인 대지주에게 ‘소작료는 4할, 지세는 지주 부담’ 등 요구안을 담은 통고문을 보내며 소작제도 정상화를 요구했다. 당시 소작료는 8할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대지주들은 이를 경찰에 신고해 조합 간부들이 경찰 조사를 받는 일들이 잦았다.
일본 경찰은 시위를 중단시키고 선전부장 이봉재 등 간부 16명을 붙잡아 양산경찰서에 가뒀다. 대부분의 조합 간부가 붙잡히자, 3월 17일 아침 농민 조합원과 구류된 가족 등 총 300여명이 양산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했다.

양산농민조합원이 양산경찰서를 습격한 사건을 보도한 1932년 3월 18일자 부산일보 신문./기념사업회/
이들은 경찰서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을 던졌다. 일부는 경찰서에 들어가 기물을 파손하며 무력 시위를 이어갔다.
“탕”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을 쐈다. 물러날 줄 알았던 시위대는 꿋꿋이 저항했고, 경찰은 실탄을 발사했다. 윤복이와 이만줄 등 2명이 숨졌다. 농민 100여명도 부산형무소에 구금됐다. 조합 간부 16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10개월에서 2년 이하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양산농민조합 활동은 중단됐다.
박정수 양산항일독립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처음에는 경찰이 공포탄을 쐈다. 비상이 걸려 숙직하던 경찰들이 전부 모여 공포탄을 쏴도 안 물러나서 실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며 “당시 사건은 부산 지역 일본 언론 및 일본 내 신문에서도 주요하게 보도됐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까지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인 ‘부산일보’에 1932년 3월 18일자 신문에 실린 양산경찰서 당시 모습./기념사업회/
올해 양산에만 11명 서훈
막냇동생만 유공자 인정 안돼
삼형제 기리는 기념시설 없어
유족들과 비석 건립 논의 중
학술대회 개최 등 재조명 필요
◇독립운동 이끈 ‘신씨 3형제’= 신영업 선생은 1899년 8월 10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당시 경남 언양군)에서 태어났다. 언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영업 선생은 귀국 후 1925년 울산군청년연맹 준비위원, 1926년 언양소년회 간부, 사상단체인 자오회 회장을 했다. 이후 언양남부농민회 간사, 조선일보 언양지국 총무 겸 기자를 맡았다.
1929년 신간회 양산지회에서도 활동한 그는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농민조합사건 당시에는 쟁의부장으로 조직을 결성했고, 시위 이후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그는 석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유공자 서훈이 늦어진 것 같다는 게 기념사업회 설명이다.
합천으로 이사해 약방을 운영한 신영업 선생은 1945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체포된 적이 있지만, 해방돼 석방됐다. 해방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그는 1950년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군과 경찰은 국민보도연맹원 및 ‘좌익 혐의자’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좌익 사상 전향·관리 목적 보도연맹이 ‘적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신영업 선생의 가족 사진. 뒷줄 맨 왼쪽부터 세 번째가 신학업 선생, 네 번째가 신동업 선생이다./기념사업회/
그의 동생인 신학업 선생은 1918년 도쿄 게이오대학 재학 중 2·8 독립 선언서에 참여하고 3·1 운동을 벌이다 퇴학당했다. 이후 언양과 양산 일대에서 농민 조합과 신간회 활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언양에서 농민 조합 시위운동을 지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3년 3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사망한 그는 2010년 뒤늦게 유공자로 인정됐다.
막내 동생인 신동업 선생도 1930년 9월 양산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임돼 독립운동에 나섰다. 당시 지역 청년 단체들은 국내에서 청년 운동을 통해 실력 양성과 계몽을 목표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신동업 선생은 두 형과 달리 경찰에 체포된 적이 없어 유공자로 인정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 형제는 1936년 한 신문의 인쇄소 광고에 세 이름이 나와 같이 사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 신학업 선생은 거창, 신영업 선생은 합천, 신동업 선생은 부산으로 갔으며, 이후 세 형제가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병길(오른쪽) 소장과 박정수 이사장이 양산시립독립기념관의 양산농민조합시위운동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인터뷰〉 이병길 양산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부설 항일독립운동 연구소장
“신영업 형제 독립운동 기억하려면 지자체 도움 절실”

-양산농민조합 시위의 의의는 무엇인지.
△1930년대 경남 지역에는 소작쟁의(소작농민의 투쟁)가 수시로 발생했다. 조선인 소작농의 요구는 소작료를 내려 달라는 것과 소작권은 이전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지주가 소작원을 뺏어 다른 소작농에게 줬다는 거다. 즉, 소작농끼리 싸우게 만들어 내부 분열을 키웠다. 시위 참여자들이 구속되면서 이 일대 농민조합 자체가 와해됐다. 관련 농민 시위도 사라져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기 힘들어졌다. 이 사건 이후 조합이 사라지니 중재기관이 없어져 소작쟁의가 더 심해지고,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신영업 선생과 세 형제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해 보인다. 어떻게 조명이 필요한가.
△형제가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지역 사회에서는 잘 모르고 있다. 신영업 선생과 관련된 학술대회를 통해 관련 자료를 확보하고, 재조명하는 데 노력할 것이다. 유족들과 협의해 비석을 세우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아직 이들에 대한 기념시설이 전혀 없다. 생가터 안내판조차 없는 상황이다. 지역 주민들이 신씨 형제의 독립운동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지자체 도움도 절실하다.
형제가 어떻게 하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지도 연구해야 한다. 형제가 커 온 언양 지역은 의병 전투가 격렬히 있던 곳이다.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많이 발생하면 독립운동가가 많이 배출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지역에 대한 영향이 크다. 신씨 형제도 이 같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양산은 독립운동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기념사업회는 지역 독립운동가 재조명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 신영업 선생의 손녀가 국가보훈부에 독립 유공자 확인을 요청했으나 뚜렷한 답이 없었다. 기관에서 기념사업회를 연결해 줘 관련 사료를 확인하고, 신영업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이처럼 지역의 잊힌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을 찾아 유공자가 될 수 있게끔 노력하고 있다.
박정수 기념사업회 이사장님을 비롯해 양산의 지역 리더들이 이 같은 활동을 할 수 있게 힘써 주고 있다. 개인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가 발굴, 연구에 도움을 주니 양산에서 관련 활동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었다. 5월에는 최초로 통도사 관련 독립운동 학술 행사도 계획 중이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