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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청년예술인 (18) 이상진 영화감독

영화는 삶의 원동력이자 기억창고

기사입력 : 2023-09-08 08:04:18

영화의 늪 속에 빠져 대학 자퇴 후 서울행
밤새 시나리오 쓰고 영화 현장 찾아다녀
진해서 제작한 독립영화 ‘창밖은 겨울’
작년 벚꽃영화상 수상, 각종 영화제 초청
“영화는 많은 인력과 함께하는 노동의 산물
꾸준히 좋은 영화 만들어 즐거움 주고파”

지역에도 영화는 있는가? 있다. 고군분투 중이다. 젊은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영화문법을 만들어 나간다. 무슨 무슨 협회 등 지역 인사들 모임 같은 제도권의 방식에 기대지 않고 영화 본질로 승부하는 힘겨운 청춘들이 있다. 그 일군의 영화인 중 한 사람인 이상진 감독을 만났다.

이상진 영화감독.
이상진 영화감독.

◇영화는 내 삶의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 그와 약속을 잡은 후, 극장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았다. 이 영화는 최근 몇 년 동안 할리우드에서도 사실상 찾아보기 힘든 거대담론을 생산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과 제작자의 입장보다는 감독의 성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때는 충만한 자신감이 아니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놀란 감독도 사람이기에 분명 적잖은 부담을 가졌으리라.

그렇다. 영화감독만큼 즐겁고 고독한 일이 있을까. 영화를 만드는 일은 자신을 살게 하는 노동이며 직업이다. 나를 둘러싼 많은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며 그 성공과 실패가 어깨에 얹혀 있기에 더 그러하다.

이상진 감독은 지난해 ‘창원 영화제작소 키노키오컬처스 필름오늘 네오웨이브’가 주최하는 벚꽃영화상 시상식에서 벚꽃영화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이 상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저예산 독립영화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기 위해 2022년 제정되었다. 그들 중 작품상, 배우상, 벚꽃상 등 세 분야로 나눠 수상하며, 지난해 첫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다.

그가 연출한 작품은 ‘창밖은 겨울’. 이 감독은 1991년생으로 올해 32세 진해 토박이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배경도 진해다. 진해 터미널에서 주인공 석우는 MP3를 줍게 되는데, 이것이 단순히 잃어버린 물건이 아니라 지나온 기억과 시간의 분실물이라 믿는다. 유실물보관소는 잃어버린 물건을 보관하는 것을 넘어 잃어버린 시간, 옛사람과의 인연 등을 보관하는 장소도 된다는 생각으로 이 영화를 구상했다고 한다.

그 분절의 시간 속에서 시계 바늘은 어느새 가을에서 겨울로 향해 있다. 이 이야기는 이상진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처럼 읽힌다. 청춘에게 있어 잊고 싶은 과거는 그곳과 쉽게 단절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그 빛깔이 짙어질수록 방황의 날들은 길어진다. 이것이 바로 젊은날의 초상이 아닌가.

영화 ‘창밖은 겨울’ 스틸 장면.
영화 ‘창밖은 겨울’ 스틸 장면.
영화 ‘창밖은 겨울’ 스틸 장면.
영화 ‘창밖은 겨울’ 스틸 장면.
영화 ‘창밖은 겨울’ 스틸 장면.
영화 ‘창밖은 겨울’ 스틸 장면.

◇청춘, 영화의 늪 속에 빠지다= 이상진 감독에게 “영화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참 어렵고 모호한 질문임을 알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막 입문의 길에 들어섰으며 그 길에서 방향을 찾고자 하는 욕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온 첫 대답은 ‘일’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일이란 생각으로 임하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를 하면 할수록 이것이 나의 노동이며 생활이구나 하는 마음이 더 깊어진단다. 시나리오 창작, 등장인물 섭외, 촬영 준비에 장소 헌팅, 촬영 후 편집 등등 완성까지 많은 인력과 노동의 산물임을 절감한다. 실패를 두려워 않을 정도의 내공을 쌓는 일은 결코 만만찮은 과정이지만 게으름의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동원력이기도 하다. 미래 삶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어떤 곳으로 굴러갈지는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이 일 제쳐놓고는 말하기 쉽지 않다는 대답이다.

이 길에 들기 전, 영화감독은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예술적 재능이며 열정도 괄호를 칠만큼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자신을 보곤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 삶을 선택하지 않으면 더 큰 후회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아, 이 고통이 곧 나의 구원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서울행 열차를 타고, 밤새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현장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제 제법 멀리 와 버렸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수밖에 없다. 이 노동의 대가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 내 영화를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이상진 감독이 ‘창밖은 겨울’ 촬영 모니터를 보고 있다.
이상진 감독이 ‘창밖은 겨울’ 촬영 모니터를 보고 있다.
영화 ‘창밖은 겨울’로 합천수려한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영화 ‘창밖은 겨울’로 합천수려한영화제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 이상진의 영화, ‘이상진다움’을 고민하면서= 좋아하는 감독으로는 봉준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두 사람을 든다. 봉준호야 말할 필요 없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처음 영상을 시작할 때, “언어보다는 이미지로 작업해보고 싶다”는 말과 그것을 실천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실제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은 사색적이고 유려한 영상을 통해 미국의 평론가 댄 호프만에게 “죽음과 회한에 관한 그래픽한 명상”이란 극찬을 받았으며 베니스영화제 황금오셀리오니상과 밴쿠버와 시카고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키도 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가장 일본다운 소설을 썼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가장 일본다운 영화를 만들었다. 그 ‘일본다움을 감독다움’이란 말로 치환해본다면 이상진은 자신만의 색깔에 충실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창밖은 겨울’은 이상진 감독에게 이정표 같은 영화다. 1만명에 가까운 관객이 봤고, 벚꽃영화상을 비롯하여 전주국제영화제, 전북독립영화제, 마리끌레르영화제에 초청받았다. 합천수려한영화제에서는 우수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독립영화 치곤 가시적인 성과가 좋은 편이라고 하자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많이 부족하고 이제 시작입니다. 제가 받은 상들은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지역 영화인에게 주는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저예산 영화지만 앞날을 향한 디딤돌은 될 듯합니다.”라며 웃는다.

어떤 영화인이 되고 싶으냐는 물음에 꾸준히 영화 찍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하긴, 유명 감독들의 필모그래피에도 그리 드러나지 않는 범작도 있다. 임권택도 스스로 영화 인생의 초반부는 묻어버리고 싶은 흑역사로 가득하다고 했다. 70년대까지 주로 반공, 반일을 소재로 한 저예산 영화들을 다작했는데 훗날의 성공이 있기까지 생산한 그 흑역사 또한 임권택이 걸어온 길이 아닌가.

그렇다. 시인의 시집 속엔 빛나는 작품도 있고 태작(作)도 있다. 그런 태작이 있기에 몇 편의 가작들이 빛나는 것이다. 진정한 영화인은 매일 직장 나가는 직장인처럼 영화판에 사는 사람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젊은 청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니 상업 영화 여러 편 찍은, 산전수전 다 겪은 감독 같은 의젓함이 묻어난다.

이달균 시인
이달균 시인

이달균 시인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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