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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청년예술인 (26)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

존재가치 빛내준 거창서 음악으로 거창을 빛내다

기사입력 : 2023-11-10 07:59:03

초등생 때 서울서 이사와
진주·서울 오가며 바이올린 배워
각종 대회 잇단 수상하며 연세대 진학
졸업 후 거창에 돌아와 클래식 보급
비영리단체 구성, 연주회 등 활발
여성 대상 프로그램 기획도

산수 아름다운 곳에 ‘지혜의 눈’을 가지게 하는 교육으로 거창고교가 알려지자 용기 있는 학부모들은 대도시에서 거창으로 자녀를 유학 보내기 시작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의 경우 서울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 피아노를 전공한 어머니와 소설가인 아버지가 딸의 교육을 위해 거창으로 이사하자 초·중·고를 거창에서 졸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

서울에 있을 때는 이혜명이 집과 가까운 곳에서 바이올린을 배웠으나, 거창에선 바이올린을 지도해 줄 스승을 찾을 수 없어 일주일에 한 번씩 버스로 진주에 가서 배웠다. 수업과 왕복 소요 시간을 보태면 초등학생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라 부모님이 진로를 고민하던 중 초등 6학년 때 거창 아림예술제에 나가 대상을 받았다. 악기별로 초·중·고 1등 수상자를 선정하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이 대상을 받는 제도라 대부분 고등학생이 받았지만, 이 해에는 초등학생 이혜명이 받았다.

진주까지 다니다 지치고 열정이 식으면 스스로 바이올린을 그만두겠거니 했으나, 이혜명이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 다니자, 부모님은 진로를 바꿀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어린 나이에 애처롭기도 하고 저렇게 고생해서 음악인이 된들 경제적으로 고달픔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 같다. 중 3이 되자 진주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선생님마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학습 환경은 더 악화되었다. 이런 형편에도 바이올린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자, 어머니가 조건을 내걸었다.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음을 증명해 보여라, 그렇지 못하면 진로를 바꾸자”라고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가 연주를 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가 연주를 하고 있다.

레슨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주시에서 개최하는 개천예술제에 나가 바흐의 ‘무반주 솔로 소나타’를 연주해 중등부 1등을 하자 그때부터 부모님은 진로에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립된 곳에서 바깥 정보 없이 계속 음악을 해야 한다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막막하고 갑갑하던 시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방학 중에 음악캠프의 일종인 강원대에서 1주간 진행한 ‘음악 춘추’였다. 전국에서 모인 음악 지망생들과 음악에 대한 정보와 유대를 나눌 수 있었다. 이 해에 음악 선생님의 추천으로 교육부 예능 부문 장관상을 받게 되자 자신감이 생겼다.

2021년 거창음악협회 정기연주회.
2021년 거창음악협회 정기연주회.

거창고 1학년 때 개천예술제에 고등부 바이올린에서 생상스 바이올린 협주곡 3번 1악장을 연주하여 1등을 차지했고, 고3 때는 중부대학 주최 콩쿠르에 나가 1등을 했다. 거창고의 인문계 교과 과정을 소화하면서 별도로 음대 진학을 위해 고3 때 1주에 한 번씩 레슨을 받기 위해 서울로 다녔다.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많은 경비와 시간과 노력이 들었고, 다행히 결과가 좋아 연세대 음대 기악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때 성적이 좋은 편에 들어 오케스트라 악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동기들이 해외 유학이나 이름 있는 악단에 들어갔으나, 이혜명은 좌우 살피지 않고 과거 자기처럼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거창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가 연주를 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가 연주를 하고 있다.

거창고가 훌륭한 많은 인재를 배출했지만, 이 학교 ‘직업선택 10계명’이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알려지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0계명 한 문장 한 문장은 우리 사회의 찌들고 막혀 질병이 된 곳을 명의가 침으로 시원하게 뚫는 역할을 한다. 그중 하나가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원하는 곳을 택하라”라는 말이 있다. 편안하고 화려한 곳을 마다하고 지혜의 눈을 뜬 이혜명은 거창으로 돌아와 코리안필하모니 팝스오케스트라, 거창 윈드오케스트라, 진주시립교향악단 등과 협연을 하기도 하며 클래식 음악의 보급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올해 38세(1985년생) 젊은 음악인으로 가까운 거리가 아닌 김천예술고, 경북예술영재원 등에 출강하며 일주일의 스케줄이 꽉 차 있다.

지난 10월 초 그와 약속을 하고 거창 외곽 카페에서 만나 지방에 살면서 어떤 보람이 있는지 물었더니, “클래식 음악은 하기 어렵고 접근하기조차 어렵다는 편견을 깨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문턱이 낮은 연주회를 기획하여 관객과 자주 만나 경험을 통해 친숙하게 여길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장소와 청중을 가리지 않고 연주를 하고, 한편으로는 도서관에서 클래식 음악 강좌인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해설이 있는 음악회’ 등 프로그램을 장기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저변확대를 위해 취미와 전공 구분 없이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을 만나 악기 레슨도 하고 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음악인들과 노력으로 문턱이 낮아지고 저변확대의 효과가 조금씩 보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명씨.

현재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중학교 내신 성적에 따라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비평준화 지역이라 제도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진로를 탐색해야 하는데, 악기는 초등학교 때 잠시 취미로만 생각하고 그만두는 실정입니다. 음악을 직접 가르쳐 대학에 진학시켜 보니 다른 공부에 비해 특별히 비용이 많이 들거나 위험 부담도 크지 않고, 일자리도 일반 인문계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교육제도와 연결되어 있어 힘이 더 듭니다”라 했다.

2022년 아코디어니스트와 협연 중인 이혜명씨.
2022년 아코디어니스트와 협연 중인 이혜명씨.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 있는 여성분들에게 음악을 통한 위로와 경험이 필요하고, 음악은 조기 교육이 중요합니다. 현실은 산모와 어린아이가 함께 음악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다른 여성 음악가들과 함께 2022년 비영리단체를 만들어 등록했고, ‘엄마가 들려주는 클래식’, ‘갱년기 여성을 위로하는 콘서트’ 등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조기 교육과 여성의 역할이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본적인 것부터 하고 있습니다”라며 음악인으로 현재의 할 일과 미래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실천하고 있었다. 짧은 만남에 속내를 다 내보이지는 않았으나, 거창을 장차 음악과 연극의 도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같은 곳으로 설계하고 기획하는 것 같았다. 재능과 뜻이 있는 사람이 모이고 시간과 전통이 쌓이면 못할 것도 없을 것이다.

조평래(소설가)
조평래(소설가)

조평래(소설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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