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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 만난 우리 시대의 청년예술인 (23) 피아니스트 오예진

피아노는 실험실... 음악을 그리고 그림을 연주하다

기사입력 : 2023-10-20 08:06:36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만 몰두하다
대학 졸업 후 회의감 들어
독일서 즉흥 연주로 새로운 음악 접해

창원에 ‘진뮤직’ 문화공간 만들어
책·미술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예술 융합 ‘프리뮤직’ 작업 몰입

경기도 고교 음악교과서에
‘음악과 융합’ 부문 직업 수록도

그랜드 피아노를 등지고 앉은 그녀의 손이 크고 흰 종이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눈을 감고 뭔가에 도취한 듯 어깨를 좌우로 움직이는 그녀. 붓끝에서 물감이 똑 떨어진다. 갑자기 신들린 듯 그녀의 손에 들린 붓이 옆으로, 위아래로, 힘차게 움직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느리게, 그리고 아주 느리게 움직이다가 강하게 내리찍기도 한다. 그녀의 손 움직임에 따라 종이 위엔 다양한 색채의 물감들이 알 수 없는 기호처럼 선과 점으로 이어진다. 때로는 바람 같고, 때로는 파도 같고, 때로는 어떤 소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건 모두 소리였다. 마음속에 격렬하게 요동치는 자유로운 음과 박자를 그녀는 악보 위가 아니라 종이 위에서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과 미술을 피아노 연주로 풀어내는 피아니스트 오예진씨.
책과 미술을 피아노 연주로 풀어내는 피아니스트 오예진씨.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여자. 피아니스트 오예진(39).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그림을 보니, 문득 캔버스 위에 그림으로 음악을 표현했던 추상주의 화가 칸딘스키가 겹쳐진다. 왜 그녀는 종이 위에 음악을 표현하는지, 도대체 피아니스트인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주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언제나 학교 갔다 오는 시간 외엔 항상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어요. 피아노가 좋았냐고요? 그땐 그런 생각도 안 했죠. 학원에 가면 학원이 끝날 때까지 앉아 피아노를 쳤고,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좋아해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내보내지 않으셨대요. 나는 그냥 그래야 하는 줄 알았을 뿐이고요.”

오예진씨가 그림을 보고 그 느낌을 즉흥으로 연주하는 프리뮤직 시연을 하고 있다.
오예진씨가 그림을 보고 그 느낌을 즉흥으로 연주하는 프리뮤직 시연을 하고 있다.

말끝에 아마도 싫지 않았으니 종일 피아노를 칠 수 있지 않았겠느냐면서 웃었다. 원래가 내성적인 성격이고 소극적이라고 했다. 정말 공부하는 시간 외에는 피아노밖에 몰랐다. 대학까지 죽 그렇게 이어졌다. 창원대학교 예술대학 음악과 시절, 하도 피아노만 쳐대는 오예진에게 친구들이 영화 보러 가자고 꼬드겼다. 취미도 외부 활동도 없이 피아노만 주야장천 치고 앉은 오예진이 안돼 보여서 밖으로 끌어낸 것. 그런데 정작 오예진은 영화관에서 영화 끝날 때까지 잠만 잤단다.

권태기조차도 없이 피아노만 치던 오예진에게 정작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건 대학 졸업 후 어느 정도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해 가던 시기였다고 했다. 두 가지 문제였다. 학창 시절까지는 음악에만 몰두하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오고 보니 음악이 과연 자신의 생명 줄이 되어 줄 수 있을까 하는 회의. 학교 동문과 스승들이 연줄이 되어 이런저런 연주회 자리를 만들어 갔지만 그것이 생활인으로 만족할 수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항상 똑같은 악보를 계명처럼 삼아 똑같이 치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음악 본질적 회의였다.

2018년 12월 오픈한 문화공간 진뮤직에서 연주회.
2018년 12월 오픈한 문화공간 진뮤직에서 연주회.
오예진씨가 창원 소재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쇼팽의 음악편지 강의를 하고 있다.
오예진씨가 창원 소재 초등학교 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쇼팽의 음악편지 강의를 하고 있다.

이 두 가지 문제는 결국 피아니스트로서의 오예진에게 두 번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한다. 한 번은 무작정 보따리 싸 들고 중국으로 줄행랑(?) 쳤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조심스럽게 독일유학의 문을 노크했을 때다.

성산아트홀에서 창원시립교향악단과 협연이 얼마 남지 않은 중요한 시기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오예진은 결국은 가방을 챙겨 중국으로 떠났다. 그녀에게 중요한 멘토였던 선생님은 “너 정말 정신 나간 거 아니냐?”며 화를 냈지만 이미 피아노에 대한 회의가 깊어진 오예진에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협연 연습을 위한 악보는 챙겨갔다며 웃었다. 중국에서 며칠간 방황하는 동안 오예진 스스로 비워버린 마음속에 조금씩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돈오돈수(頓悟頓修), 단숨에 깨달음을 얻듯, 피아노가 없다면 자신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 길로 발길을 돌려 한국으로 왔다.

프리뮤직을 설명하는 오예진 피아니스트.
프리뮤직을 설명하는 오예진 피아니스트.

또 한 번은 유학에 대한 갈등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여비 약간 들고 미리 방문등록을 한 독일문화원으로 갔다. 초행이고 말도 서투른 데다가 너무 긴장해서 독일 밤거리에서 구토가 났다고 한다. 어렵사리 문화원에서 만난 연주자는 그녀가 가지고 간 악보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 했다. 무작정 피아노를 쳐보라는 것. 오예진의 연주를 경청하던 그는 한 가지 팁을 주었다. 기존 악보를 기본으로 하되 본인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자연스레 연주하라는 것. 함께 피아노 연주를 해보자고 했다. 상대의 연주와 나의 연주가 즉흥적으로 하모니를 이루어 가는 과정은 엄청난 경험이었고 그 풍부한 가능성에 매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오예진은 유학의 꿈을 접었다.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맛본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프리뮤직’을 접했고 음악의 또 다른 세계와 만났다. 책을 읽고 그 느낌을 연주하거나, 음악을 종이 위에 ‘그리고’ 그것을 눈으로 감상하는 실험적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퓨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예술의 융합으로 해석하는 게 옳을 듯했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

지금 오예진 피아니스트는 창원에 ‘진뮤직JINMUSIC’이라는 연주를 겸한 문화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초등학생, 학부모들과 함께 음악을 기반으로 책과 미술을 입체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다. 책을 읽고 책에서 얻은 감성을 각자 돌아가면서 피아노로 풀어내는 작업에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도 신이 난다. 연주자와 관객이 함께 그랜드 피아노 소리를 듣고 만지고 직접 생각나는 대로 쳐보기도 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그 과정을 기록한 ‘찐뮤직신보’를 발행 중인데, 제1호 ‘창원이 왔다 - 책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시작으로 제2호 ‘그림을 듣고 음악을 본다’를 거쳐 지금 이미 23호 ‘존재’까지 발행했다.

2022년 정부 부처와 교과연구회의 협업 교과서, 고등학교 선택교과목 ‘음악과 융합’ 자료.
2022년 정부 부처와 교과연구회의 협업 교과서, 고등학교 선택교과목 ‘음악과 융합’ 자료.

오예진 피아니스트가 개발하는 이런 독특한 콘텐츠가 앞으로 빛을 볼 수 있는 긍정적 신호도 있다. 경기도교육청이 발간하는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음악과 융합’이라는 제목으로 그림과 음악의 융합을 시도하는 페이지에 오예진의 직업이 수록된 것이다. 교과서 집필교사가 음악구성요소를 잘 표현한 회화작가, 파울 클레 관련 내용 집필 중에 때마침 오예진의 유튜브 채널에 있던 클레 그림음악 연주 영상을 보고 교과서에 싣게 되었다. 올해 발간되어 현재는 고등학교 한 군데만 선정되었는데 앞으로 많은 학교가 선정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해나가는 그녀의 도전적 자세는 융합의 시대에 희망을 예감하기에 충분했다.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김홍섭 소설가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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