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이야기- 진주 대동공업] 5부 김삼만과 기공일생(機工一生) ② 100년 전 진주는
은행과 조합, 서당 대신 학교… 개화 문명 밀물처럼 밀려들다
1918년 금융기관 조선식산은행 등 설립
1907년 실시 지방 금융조합, 진주에도 개설
일제강점기 1921년 신식교육 학교 세워져
김삼만 아버지 빚보증 서주는 이사 등록
집·논밭 넘어가 9명 식구 뿔뿔이 흩어져
서당 운영하던 선비 지식인 외조부 권유
10세 되던 해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입학
일본은 조선 경제의 수탈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금융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식산은행, 농협금융조합 등을 중앙과 지방에 설립하였다. 당시 조선은 농촌과 도시에 협동조합과 유사한 계(契)가 폭넓게 운영되고 있었기에, 1920년대 은행 업무는 일반 서민들에게는 모두 생소한 기관이었다.

일제강점기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 우측이 배영초등학교(현 진주교육지원청)이다. 앞쪽은 저수지 대사지이다. 뒤쪽에 솟은 산은 비봉산이다./진주100년사 기록/
◇진주에 설립된 은행
대한제국 시기인 1906년 전국에 8개 은행이 설립되었는데, 진주에는 진주 농공은행이 남강 벼랑 위에 세워졌다. 1908년 진주 농공은행은 대구 농공은행과 합병되어 경상 농공은행으로 다시 설립되고, 진주에 지점도 개설하였다.
1918년 10월에는 전국의 6개 농공은행이 합병되어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으로 새롭게 설립되면서 경상 농공은행 진주지점도 진주 식산은행 진주지점으로 개명되었다.
조선식산은행 설립 목적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의 농업 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을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조선식산은행의 진주지점은 최초 진주성 안 세무서 인근에 설치되었다가 훗날 남성동(구 진주 국보극장터 옆)으로 이전하였다. 이 은행의 맞은편이 1931년 구인회가 진주에서 최초로 포목점을 개설한 곳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조선에 설립한 국책회사로 농업경영과 이민사업 등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13년에 설립된 경남은행과 대구은행은 1928년 합병되어 경상합동은행으로 재탄생되었다. 1929년 12월 진주 영정(대안동) 218-1번지에 진주지점이 개설되었다.

진주성 정비를 하지 않았을 때의 성내부 모습, 촉석루와 야산 부근에 많은 주택이 있는데 이곳을 성안의 마을로 안산, 행정명으로 성내동이라 불렀다. 1920년대 이곳에 김삼만의 집과 조선식산은행 진주지점, 진주 세무서 등이 있었다./진주사진협회/
◇진주에 설립된 금융조합
1907년 지방 금융조합제도가 실시되었다. 진주지방에도 금융조합 설립이 허가되었는데 진주, 사천, 곤양, 단성, 의령 등 5개 군을 관리하는 ‘진양(晉陽) 금융조합’이 가장 먼저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진양 금융조합 사무실 주소는 진주 본정(본성동) 305번지이다.
1918년 지방금융 조합령의 개정으로 상공업자도 회원 가입이 활성화되자 10월에는 ‘진주(晉州) 금융조합’도 설립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진양 금융조합 업무 구역 중 진주 도동, 대곡, 집현, 미천의 4개 면을 진주의 옛 이름을 적용, ‘진산(晉山)금융조합’ 이름으로 분리되었다.
이 ‘금융조합’들은 해방 후 대부분 ‘협동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현재 ‘농협(農協)’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융조합 설립 목적은 고리대 금융구조를 개선하여 경작농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합원에게는 경제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는 일도 하였다.
당시 금융조합은 정부가 임면권을 가지는 이사가 지배하는 관제조합이었다. 실제로 대부의 혜택을 받은 자는 저당 제공 능력이 있는 중농 이상의 부자와 지주, 양반들이었다. 이들은 저리로 대부받은 돈을 소작으로 내줄 토지 구입이나 고리대 자금으로 이용하였다.
◇진주 금융조합 이사, 김삼만의 아버지
1918년, 진주에 일본 상인이 중심이 되어 ‘진주 금융조합’이 설립되었다. 조합장은 일본인이 맡았고, 이사는 33명으로 절대 다수가 조선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이사는 대부분 진주지역에서 약간의 재산이 있고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김삼만의 아버지도 이사에 등록되었다.
일반인들이 금융조합에서 대출을 받으려면 보증인이 필요하였다. 이때 이사들이 하는 일이 대출자의 보증을 서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출을 받은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하면 보증 선 사람이 대신 갚아야 하는 위험한 조항이 있었다.
김삼만의 부친이 보증을 서 준 사람이 대출을 갚지 못하자 이 조항으로 인해 김삼만의 아버지가 모두 갚아야 하는 현실이 발생하였다.

지금의 진주성 풍경, 진주성내 복원 작업으로 모든 주택이 철거되었다.
◇갑자기 닥쳐온 가족의 헤어짐
법원 집달리에 의해 김삼만 가족의 집이 공매 처분되고 아버지의 피와 땀으로 일군 농토는 모두 조합과 타인에게 넘어갔다.
9명의 식구가 한데 모여 행복을 느끼며 살아온 가정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시급한 문제는 부모를 비롯한 일곱 형제 자매들이 생활할 곳과 당장의 끼니 해결이었다.
결국 함께 살아갈 공간이 없어지자 가족은 뿔뿔이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함지를 지고 야채장사를 하러 다녔다. 장남 김천세는 남의 집 농사일을 도와주기 위해 집을 떠났다.
차남 김천수는 일본인 기타카와(北川幾太郞)가 진주 본성동에서 경영하던 개문사(開門社)인쇄소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인쇄기술을 배웠다. 김삼만의 동생 김만흥과 김성민은 겨우 9세와 4세의 어린 나이였다.

현재의 진주초등학교 전경.
◇김삼만과 학교
김삼만의 외조부는 선비 지식인으로 진주에서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1917년 6세부터 김삼만은 외조부의 서당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등을 배웠다.
일제강점기 교육정책은 1921년이 되자 1면 1학교 설립 방침에 따라 신식교육 학교가 세워지면서 곳곳에 개화 문명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김삼만에게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친 외조부도 일본의 강제 점령으로 사회통치 구조를 보니 한문만 배워 가지고는 앞으로 살아가기가 힘들 것을 예측하였다. 외조부는 사위 김경서에게 “삼만이를 서당에 보내지 말고 신학문을 배우도록 하라”고 권유하였다.
이런 영향으로 김삼만은 10세가 되던 1921년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전 진주중안초등학교, 현 진주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김삼만은 산수와 공작과목 성적이 특별히 뛰어났다. 특히 학교 입학 전 서당에서 배운 한자로 인해 일본말을 아주 잘하였다. 하지만 김삼만은 1924년 아버지의 보증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시련을 겪으면서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여건이 되지 않아 보통학교 4학년 중퇴를 한 것이 최종 학력이다.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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