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루] 장유(長有)를 생각한다- 김차영(김해시 장유출장소장)

기사입력 : 2025-03-06 19:46:43

‘장유는 오랜 역사의 향기가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오래전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의 처남 허보옥이 허왕후를 따라 이 나라에 와서 이곳 장유에 절을 세우고 오랫동안 머물러 돌아가지 않다가 입적하여 후세에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유산(지금의 태정산)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자 ‘장유촌(長遊村)‘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이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장유사(長遊寺)라 하였다.(중략)

지금의 삼문리 능동 마을은 가락국시대 임금의 능(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며, 젤미마을 아파트 지역 일부는 신라 말기부터 향, 소, 부곡이라는 특수 부락의 하나인 ‘제을미(齊乙彌, 젤미)鄕’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제을미향’, ‘장유촌’, ‘유하촌’의 세 마을로 형성됐고, 조선시대 광해군 8년부터 효종 7년까지 41년 동안(1616~1656)에는 지금의 신문리 용산마을에 ‘신문진’이 설치되어 경상도의 국방 요지가 되었다. 조선 중기 여지도서(1757~1765)의 김해진김해도호부에서는 ‘유등야면’이, 호구총수(1789)에서는 유등야면에 말단 행정구역으로 18개 리(里)가 속한다고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다.

그 후 1810년(순조 10년)에 ‘유하면’으로 고쳤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다시 ‘유등야면’으로 고치고 1885년(고종 22년)에 ‘장유면(長有面)’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888년(고종 25년)에는 장유면(長有面) 8개 리(부곡, 유하, 내덕, 무계, 대청, 삼문, 신문, 관동)와 수남면(水南面) 4개 리(율하, 장유, 응달, 수가)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14년에 수남면이 장유면에 합병되었다.’

여기까지의 글은 장유 1, 2, 3동 누리집 ‘일반현황’에 글자 한 자 틀리지 않고 똑같이 올라와 있는 내용이다. 장유 1, 2, 3동으로 분리될 당시인 2013년 7월 1일 시점의 마을 소개이니 1, 2, 3동은 장유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유라는 지명은 ‘장유(長遊)화상이 세웠다는 장유사(長遊寺)에서 유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17만 인구의 장유1, 2, 3동은 역사문화적 뿌리가 같고 ‘장유(長遊)’라고 하는 커다란 콘텐츠를 공유하는 동일한 DNA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김차영(김해시 장유출장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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