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시론] 스포일러 주의- 김은영(경남도립남해대학 국제교류센터 교수)

기사입력 : 2025-03-09 19:17:36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2017년 개봉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팬텀 스레드’를 소개받았다. 지인의 안목만큼 필자의 취향에도 어김없이 훌륭한 작품이었다.

영화는 1950년대 전후 런던의 유명 드레스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이 시골식당 웨이트리스 알마와 만나 결혼하고, 둘만의 기묘한 러브스토리를 이어가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인공 역을 맡아 나이 들었지만 꼼꼼하고 세련된 포즈로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압도되는 느낌이었달까, 주인공의 탐미적인 여성 취향과 그가 바느질한 옷 솔기 속 메시지처럼 은밀하게 주어지는 통제,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실로 얽히고설킨 관계의 반전이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문제는 필자가 지인에게서 대략의 줄거리뿐 아니라 소름 돋는 반전의 장치까지 이미 전해 듣고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이 글에도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는 주의하시길 바란다.)

겉보기에 화려한 모델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지만, 연인으로서 헌신만 강요하고 진짜 마음은 주지 않는 레이놀즈에게 지친 여주인공 알마는 어느 날, 병에 걸려 무장해제된 우드콕의 모습을 보고, 그를 연약하게 만들어 오로지 자신에게만 의지하게 만들기로 결심한다. 알마가 작은 바구니를 들고 산에 올라 우드콕에게 먹일 독버섯을 찾는 장면을 지켜보는 순간 한탄이 나왔다. 내용을 전혀 짐작지 못했더라면, 이 장면이 얼마나 더 놀랍게 다가왔을까 하는 아쉬움 탓이었다.

결말과 반전을 미리 알고 보는 것도 따분한 일이지만, 판에 박힌 이야기, 뻔한 이야기를 읽거나 보는 것도 못지않게 답답한 일이다. 필자가 청소년기 한때 푹 빠져 읽었던 무협소설의 결말은 언제나 주인공이 타고난 근골과 기연으로 몇십 갑자의 내공을 획득하고, 강호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당 고수를 굴복시키는 스토리였다. 전질을 다 읽지 못하고 대본소에 반납해야 할 때는 결말만 읽고 돌려줘도 줄거리 이해에 아무 장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 시절 무협작가 중 독자가 열광하는 인기작가는 따로 있었다. 가령 ‘동서고금공전절후(東西古今空前絶後)’의 신필(神筆)로 이름난 김용(金庸)의 ‘의천도룡기’나 ‘신조협려’, ‘사조영웅전’은 지금도 새 버전의 드라마로 계속 제작되고 있다. 이유는, 비록 무협소설이지만 그만의 묘사나 전개방식이 남다른 즐거움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흔히 보는 사극 드라마나 영화도 역사가 스포일러인 작품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아는 역사적 사실을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려면, 남이 보지 못하는 각도로의 접근, 예상치 못한, 그러나 개연성 있는 인물의 등장 따위 장치가 필요하다. 예컨대 2022년 개봉한 영화 ‘올빼미’에서 안태진 감독은, 왕조실록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독살설을 바탕으로, 맹인침술사 천경수라는 전례 없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사실과 상상의 절묘한 교집합으로 영화 전편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이후 몇 달간 필자는, 온 국민과 더불어 뭔가 결말이 뻔해 보이는 정치드라마 한 편을 지루하게 강제 시청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뻔하고 식상한 드라마는 조기종영하기도 한다는데, 언제까지 이 지루한 뉴스를 계속 봐야 할지 고역이다. 그나마 흔한 무협소설의 권선징악적 결말이라도 보장돼서 최소한의 안도감이라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훌륭한 드라마는 비록 결말을 다 안다 하더라도 예상치 못한 반전과 탁월한 스타일로 관객을 압도하는 법이다. 앞으로 더 이상 ‘스포일러 주의’라고 쓰인 정치드라마는 안 봤으면 하는 바람도 한 모금 얹어 몇 자 끄적여 보았다.

김은영(경남도립남해대학 국제교류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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