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주년 3·15의거] 부정선거 맞선 시민에 무차별 발포… 정부는 ‘공산당 몰이’

[기획] 다시 3·15 ① 피로 물든 마산의 봄

기사입력 : 2025-03-11 20:11:09

2025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누구는 비상계엄령이, 누구는 부정선거가 원인이라 말합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속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유혈 민주화운동인 3·15의거가 전하는 메시지는 ‘평화’입니다. 혼란이 잦아들길 바라며 3·15의거 65주년을 맞아 지금의 시각에서 보이는 파편들을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살펴봅니다.


총탄 발포 책임자는 무죄

마산경찰서장·지청장 “쏴라” 지시
16명 희생에도 1979년 무죄 받아
총탄 쏜 경찰관들도 감형·가석방


부정 들킨 정부 여론몰이

마산시위 배후 공산당·북한 지목
“민중 봉기”·“중대한 범죄 행위”
법조계·언론계 진실 밝히며 규탄


최근 40여 년간 대한민국 국가 권력이 시민들에게 의도적으로 총탄을 발포한 사례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장 병력이 투입됐던 12·3계엄사태 때에도 발포는 일어나지 않았다. 1960년 3·15의거부터 1987년 6월민주항쟁까지 시민들이 독재와 군부정권에 대항해 이뤄낸 성과다.

그렇다면 16명의 마산 시민이 사망한 3·15의거 당시 총탄 발포 책임은 누가 물었을까. 그리고 총탄 발포 명령은 왜 어떻게 내려졌을까. 질문의 답은 대한민국의 기득권 병폐와 과도한 반공 이념 몰이에 있다.

시위 저지를 위해 마산일보사 사옥 주변에 배치돼 있는 경찰들./3·15의거기념사업회/
시위 저지를 위해 마산일보사 사옥 주변에 배치돼 있는 경찰들./3·15의거기념사업회/

◇“쏴라” 지시한 지휘부, 19년 뒤 무죄=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 날 마산 투표소 곳곳에서 부정행위가 확인됐다. 분노한 시민들은 오전부터 거리행진을 펼치며 선거 무효를 외쳤다. 오후에 관공서 앞에서 모인 군중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경찰은 이날 오후 8시가 넘어서자 시위대를 향해 총탄을 발포하기 시작했다. 마산시청, 무학초등학교, 남성동파출소 앞에서 200여 발의 총탄이 난사되면서 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후 한 달간경찰 진압으로 총 16명이 희생됐다.

제1차 마산의거(1960년 3월 15일) 당시 무차별 발포로 무학초등학교 담벽을 관통한 탄흔 사진./3·15의거기념사업회/
제1차 마산의거(1960년 3월 15일) 당시 무차별 발포로 무학초등학교 담벽을 관통한 탄흔 사진./3·15의거기념사업회/

“영감, 야단났읍(습)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빨갱이 같은 새끼들은 쏴 버리시오.”

사건 직후 진상조사에서 발포 책임자로 밝혀진 인물은 손석래 마산경찰서장과 서득룡 부산지방검찰청 마산지청장이다. 발포 전 “쏴 버려”라 말한 이들의 대화 내용은 판결문에도 명시됐다. 하지만 어떠한 처벌도 없었다.

이들은 사건 직후 붙잡히지 않고 도피했다. 3·15의거 참여자를 모조리 붙잡았던 경찰과 검찰은 상관이었던 이들을 결국 검거하지 못한다. 10여년 뒤 자수해 재판을 받지만 1979년 유신체제 안에 있는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다. 손 서장은 발포 지시 증거가 없다는 주장이, 서 지청장은 처벌 형량 규정이 미비하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발포 책임은 발포 명령에 따라 총탄을 쏜 경찰관에게 갔다. 당시 마산경찰서 소속 박종표, 김종복, 이종덕, 주희국, 이종한은 1심에서 최대 무기징역, 최소 징역 4년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대부분 시간이 지나 감형 또는 가석방됐다.

김주열 군의 시체를 바다에 버린 범인은 마산경찰서 박종표 주임이라는 마산일보 벽보를 시민들이 유심히 보고 있다./3·15의거기념사업회/
김주열 군의 시체를 바다에 버린 범인은 마산경찰서 박종표 주임이라는 마산일보 벽보를 시민들이 유심히 보고 있다./3·15의거기념사업회/

◇부정 들킨 정부의 ‘공산당 몰이’= 3·15의거 사망·부상자는 학생, 무직, 직공, 점원 등 소시민들이다. 시위의 시작은 민주당 당원이었지만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소시민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다. 부정선거가 발각된 이승만 정부는 시위를 억제할 명분이 필요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반공 이데올로기는 당시 훌륭한 명분이 됐다.

실제로 경찰은 부정선거 당일 낮부터 평화적으로 거리행진을 하던 시위대를 연행·구속했다. 시위대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규정한 데 따른 것이다. 밤에 이뤄진 총탄 발포 명령도 마산시민들을 ‘빨갱이’로 왜곡한 데에서 시작됐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이후에도 정부는 마산 시위의 배후로 공산당과 북한을 지목하며 여론 몰이에 나섰다. 2차 의거가 일어난 4월 11일 밤 북한 방송에서 시위 이야기가 나왔다는, 시위 현장에서 인민공화국 만세 구호가 들렸다는 식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설득력은 점점 잃어갔다. 법조계와 언론계가 거짓을 바로잡았기 때문이다.

대한변호사협회는 3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산에 조사단을 파견해 자체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28일 특별성명을 통해 “마산사건은 국민의 정부 시책에 대한 평소의 불신과 부정선거로 인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민중 봉기”라 규정했다. 이어 “무모한 발포로 다수를 살상한 경관 전원과 그 지휘자를 살인죄로 엄중 처단하고 고문경찰을 가차 없이 검거해 엄단하라”고 했다.

언론도 연일 관련 보도를 쏟아내며 부정선거와 마산시위의 진실을 밝혔다. 3월 19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성명을 통해 “사건 후 이 비인도적인 처사에 대한 책임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위협적인 언사로 민중을 대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는 해괴하다”고 지적했다.

재마산 언론인들도 당시 서울신문 마산총국장의 잘못된 증언을 바로잡으며 “공산당과 결부시켜 데모에 참가한 많은 학생, 청소년, 시민을 ‘빨갱이’로 몰고 무차별 총격과 고문·폭행을 합법화시키려는 목적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중대한 범죄행위”라고 규탄했다.

이장희 창원대 법학과 교수는 3·15의거를 되돌아보며 “3·15부정선거는 본질상 내란행위에 해당하지만 관련자의 형사처벌은 충분하지 못했다”며 “군사독재 하에 재판은 불공정하게 끝났지만 앞으로 진실을 확인하고 정의를 회복·유지하는 작업이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이 기사는 개별 취재와 함께 11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3·15의거 제65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진실화해위원회 주최)에서 발제자로 나선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와 이장희 창원대 법학과 교수의 발표를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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