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나공간] 양산 평산동 ‘슈어라운지’

책 한 권, 차 한 잔, 영화 한 편… ‘나’를 위한 선물 같은 쉼터

기사입력 : 2025-03-11 21:37:18

패션디자인과 졸업 후 브랜드 론칭
십수년 쉼없이 달리다 무력감 느껴
본가 양산 내려와 5년째 공간 꾸려

평일은 카페, 주말 저녁 펍으로 변신
책·옷 팔고 영화 상영에 전시까지

이곳만의 특색이자 자랑 ‘질문의 벽’
손님들에 ‘나를 알아가는 경험’ 선사
현재까지 4개 문답 빼곡하게 자리

“보다 더 나은 삶 위한 큐레이션 제공
동네서 가장 신뢰받는 공간 되고파”


의아했다. 이곳이 햇수로 5년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언뜻 보기에 낯선?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것이 요즘 세대들이 앞다퉈 찾을 만한 곳임에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선했다고 할까.

아무튼 직접 다녀와서 든 생각은 ‘괜히 찾았다’였다. 왠지 모르게 취향이던 느낌은 실제로 보니 더욱 이 방문자를 매료시켰기에. ‘나만 알고 싶은데 이걸 공유해줘야 하나’ 생각하길 한참, 가까스로 마음을 잡고 소개해보는 이달의 공간, 양산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다.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가 ‘질문의 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가 ‘질문의 벽’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가 1주년마다 적어온 질문 아래로 방문한 손님들의 답변지들이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다./김승권 기자/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가 1주년마다 적어온 질문 아래로 방문한 손님들의 답변지들이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다./김승권 기자/

이곳은 커피와 케이크, 맥주와 와인, 간단한 안주와 옷, 접시와 지갑, 책과 수첩 등을 팔기에 카페이자 펍, 쇼룸이자 편집숍 어느 것으로 소개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이것저것 다 있는 잡화점을 상상하게 된다면 나의 표현이 모자란 것이니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길.

평소에는 조용한 카페지만, 금요일부터 주말 저녁이 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슈어뮤직라운지’라는 콘셉트로 카페의 조도를 내리고 음악을 키우니, 한층 더 펍(pub) 같다. 벽면에는 빔프로젝트를 이용해 영화 등 영상을 틀어놓고, 손님들의 신청곡을 받는다. 또한 이곳은 책 1권 다 읽으면 아메리카노를 증정하는 ‘슈어북클럽’과, 영화를 소개하고 비정기적으로 상영을 진행하는 ‘슈어무비나잇’ 등 여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공간은 이게 다가 아니다. 슈어라운지의 구심점이자 원동력인 숨겨진 곳이 있다. 바로 계산대 뒤 가림막 커튼 너머, 슈어라운지를 책임지는 대표이자 패션디자이너 김양국(45)씨의 작업실이다.

“사실 처음부터 카페를 열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작업실이 필요했는데, 생각보다 작업에 필요한 공간은 크지 않더라고요. 그럼 남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일이 커졌어요.”

남는 공간을 제품을 전시하는 쇼룸으로 둘까 싶었다. 손님들이 구경하며 가벼운 음료를 마실 수 있도록 RTD(Ready-To-Drink) 음료를 두어 볼까 생각하던 중 ‘커피 없으면 안 된다’는 지인들의 조언을 받들어 지금의 슈어라운지가 탄생했다.

양산시 평산동 ‘슈어라운지’ 내부.
양산시 평산동 ‘슈어라운지’ 내부.
양산시 평산동 ‘슈어라운지’ 내부.
양산시 평산동 ‘슈어라운지’ 내부.

출발이 카페가 아니었기에, 이곳은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공간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큐레이션’을 제공하는 곳, ‘잘 사는 시간을 선물하는 공간’을 표방한다. 그러니까 인기 있거나 독특한 물건들을 대충 갖다 놓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만히 둘러보면 이 같은 패턴을 발견할 수 있는데, 꼭 물건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맘때 보면 좋을 영화라든가 상황에 어울리는 노래 같은, 주인장이 그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것들 모두다.

좋아하는 것을 해서 얻는 기쁨과 그 기쁨을 남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만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 김양국 대표의 오랜 습관이다.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김승권 기자/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김승권 기자/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김승권 기자/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김승권 기자/

“예쁜 옷을 입으면 기분이 좋잖아요. 그 기분 좋은 감동을, 어렸을 때 저는 엄청 크게 받아들였거든요. 그래서 내가 만든 옷을 입은 누군가도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게 싶어서 디자이너가 됐거든요. 그거랑 같아요.”

‘이 세상 물정 모르게 순수한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던 내 속이 보였는지 그가 말을 잇는다.

대표 메뉴인 슈어아몬드 크림라떼./김승권 기자/
대표 메뉴인 슈어아몬드 크림라떼./김승권 기자/

“패션디자인학과 졸업 후 브랜드를 만들었는데, 운 좋게 처음부터 옷을 많이 팔았어요. 아마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하다 보면 돈이 따라온다거나 좋은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하는 것 같아요. 그 뒤로 한 번도 따라온 적은 없는 것 같지만요. 하하”

그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면 돈보다는 명분을 선택하더라고, 자랑하려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는 고치고 싶은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올해로 5년 차인 이곳이 아직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최근에 와서야 시작한 ‘영수증 리뷰 이벤트’ 같은 것은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느지막이 시도해본 현실과의 타협이다.

판매하고 있는 옷.
판매하고 있는 옷.
공간 한쪽에 책과 엽서, 컵 등이 진열돼 있다.
공간 한쪽에 책과 엽서, 컵 등이 진열돼 있다.

하지만 말마따나 좋아하는 일을 해서 돈은 안 따라왔을지 몰라도 좋은 결과는 따라온 게 분명하다. 그가 말하길, 의도한 게 없던 이곳 슈어라운지가 ‘어째 저째’ 흘러가는 것만 보아도 말이다.

이 중 제일은 슈어라운지 특색이자 이 공간을 찾게 된 이유, ‘질문의 벽’이다. 1주년마다 질문을 적고 1년 동안 손님들에게서 답변을 얻는다. 지난해 11월로 4주년을 넘긴 만큼 벽엔 4개의 질문이 자리하는데, 그 아래로 손님들의 답변들이 빼곡하다.

“공간을 열고 전시를 두 번 했어요. 처음에는 저의 제품을 소개하는 전시, 두 번째는 저희 손님 중에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이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는 거였어요. 그때 전시 주제가 어떤 편안함에 관한 거였는데, 그 친구랑 얘기하면서 ‘그냥 전시만 하지 말고 사람들하고 소통할 수 있는 어떤 걸 만들자’ 했죠. 그래서 질문을 써놓고 사람들이 답변하는 걸 했던 게 시작이었습니다.”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가 1주년마다 적어온 질문 아래로 방문한 손님들의 답변지들이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다./김승권 기자/
김양국 슈어라운지 대표가 1주년마다 적어온 질문 아래로 방문한 손님들의 답변지들이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다./김승권 기자/

생각보다 호응이 좋았다. 가령 ‘영수증 리뷰 이벤트’처럼 대가를 지급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나서서 답변을 쓰기 바빴다. 그때 김 대표는 사람들이 무언가를 쓰고 싶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가 있구나 느꼈다고.

“써 놓고 몇 달 뒤에 와서 자기 메모를 찾아봐요. 친구랑 와서 다시 또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쓴 거 보고 웃고. 이게 좋은 프로그램이 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질문의 벽’은 슈어라운지의 콘텐츠가 되었다. 질문은 ‘잘 사는 시간’이나 ‘더 나은 삶’으로 통하는, 슈어라운지의 슬로건과 닿아 있다. 쉽게 말하면 인생, 행복 이런 것들.

“인생이라는 게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나’에 대한 질문들을 적고 있습니다.”

첫해에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에서 이듬해엔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가’를, 이어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를 물었고, 지금은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금요일과 주말 저녁빔프로젝트를 이용해 영화 등 영상을 틀어놓고 손님들에게 신청곡을 받는 ‘슈어뮤직라운지’ 안내문.
금요일과 주말 저녁빔프로젝트를 이용해 영화 등 영상을 틀어놓고 손님들에게 신청곡을 받는 ‘슈어뮤직라운지’ 안내문.

‘질문의 벽’은 손님들에게만 ‘나를 알아가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양국 씨부터 자신을 알아가고 있다.

“어떤 질문을 할까 오래 고민하거든요. 그래서 적을 때 이미 저는 답을 내린 경우죠. 쓰기 전이랑 비교해 ‘나를 훨씬 많이 알게 됐어’ 이런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나에 대해 알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손님들 답변을 보며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가령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같은 질문에 ‘한 가지에 미친 사람’이라고 적은 사람이 있고, ‘어느 하나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적은 분도 있었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생각하죠.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요.”

손님들이 뜨개질과 책을 읽고 있다./김승권 기자/
손님들이 뜨개질과 책을 읽고 있다./김승권 기자/

김 대표가 십수 년 서울 생활을 뒤로하고 2020년 이곳 양산으로 온 때부터 사실 이 질문은 시작됐는지 모른다. 2006년 ‘알보(ALVO)’ 브랜드를 론칭했고, 2016년부터는 ‘유주얼에딧(USUAL EDIT)’, 이어 머브클로딩(MUVE CLOTHING)과 ‘슈어(SUURE)’까지 말 그대로 쉼 없이 달려온 뒤였다. 심각한 무력감이 몰려오던 차에 부모님이 계신 양산으로 향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때, 할 여력도 없던 때에 김 대표는 자신의 노트를 꺼내보았다고. 틈틈이 기록해오던 ‘내가 좋아하는 100가지’ 노트였다. 그는 좋아하는 것들을 적어 놓은 노트를 보고, 또 몇 가지를 행동에 옮기며 조금씩 권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다 보니 힘이 생겼고, 그 계기로 일명 ‘도파민 운동 티셔츠’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삶에 꼭 필요하진 않지만 있으면 풍요로운 것들 세 가지를 적어 넣은 레터링 티셔츠.)

양산시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김승권 기자/
양산시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김승권 기자/
양산시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 내부. /김승권 기자/
양산시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 내부. /김승권 기자/
양산시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 내부. /김승권 기자/
양산시 평산동의 슈어라운지(suure lounge) 내부. /김승권 기자/

지금 김 대표의 소망은 ‘슈어라운지’ 공간이 오래 유지되는 것이다. 그저 오래된 공간이 아닌, 동네에서 가장 신뢰받는 공간. 물론 신뢰에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5년, 10년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것은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김 대표가 생각하는 건 그동안 계속해서 좋은 퍼포먼스(성과)를 쌓아가는 것. 그 밑바탕에 지역주민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어쩌면 삶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김 대표가 만든 ‘내가 좋아하는 100가지(100 Things I like)’ 노트 첫 장을 이루는 문장이다. 슈어라운지에서 당신에 대해 알아가기를, 삶이 더욱 풍요롭기를 바란다.

글= 김현미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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