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이야기- 진주 대동공업] 5부 김삼만과 기공일생(機工一生) ① 대동공업 창업주 김삼만

아버지로부터 배운 검소함 ‘농촌 근대화의 주역’ 만들다

기사입력 : 2025-03-07 08:05:52

김경서·안인악 부부 5남 2녀 중 넷째

1912년 진주성 내 북쪽 안산서 태어나

유년시절부터 알뜰·성실함 체득 성장

훗날 대동공업사 사훈도 ‘근검, 절약’


나고 자란 진주, 30년간 경남 대표지역

1920년대 도청 부산행으로 시민 분노

매일 궐기대회 벌이며 저항했던 도시


1960년대 소와 쟁기에 의존하던 대한민국 농촌에 경운기를 보급한 전설적인 경영인 김삼만. 김삼만 대동그룹 창업회장은 해방 후 진주에서 대동공업사를 설립한 분으로 한국 농촌 근대화의 주역이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삼성, LG, GS, 효성그룹 등 부자 기(氣) 받기 시리즈를 연재해 온 필자가 대동공업사 김삼만 창업회장의 일대기를 ‘김삼만과 기공일생’이란 기록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3월 7일부터 매주 금요일 지면을 통하여 약 6개월간 연재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김삼만 대동공업사 창업회장.
김삼만 대동공업사 창업회장.

김삼만은 1912년 6월 19일, 진주성 내 북쪽 야산 기슭에 있는 ‘안산’ 또는 ‘성내동’이라 부르는 곳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경서(金敬瑞, 1883~1951)와 고향이 진주인 모친 김해 안씨 인악(仁岳) 여사 사이에 5남 2녀중 넷째이다.

두 분의 형과 한 분의 누나, 1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부친 김경서는 삼천포시 와룡산 기슭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노모를 모시고 생활하던 중 1898년 16세 때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아내의 고향인 진주성내 성내동(안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 진주는 경상도 남부지역의 대표도시로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진주로 이사가자

진주에 정착한 김경서는 농사일 외 배운 기술도 없고 농토도 없어 부부가 할 수 있는 것은 막일과 품삯일이었다.

부부는 일감이 크고 작든 모든 일에 오직 성실과 근면으로 책임을 다하여 주변의 신임을 많이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몇 해 후에는 타인의 논을 빌려 수확, 분배하는 소작농이 되어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남다른 부지런함과 책임감으로 일을 한 지 몇 년 후에는 비록 적은 면적이지만 본인 소유의 농토도 생겨났고, 성내동 내 초가집도 마련하는 등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쌓았다.

하지만 계속하여 김삼만의 형제 자매가 출생하여 식구가 늘어나자 소유하고 있는 농지의 수확만으로는 가정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김경서가 선택한 첫 번째는 성실함으로 살림을 늘렸다면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은 가정에서부터 근검, 절약으로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일평생을 기계와 함께 한 김삼만의 인생 이력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김종필 국무총리가 김삼만 회장 회갑 기념으로 드린 ‘기공일생’ 휘호.
일평생을 기계와 함께 한 김삼만의 인생 이력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김종필 국무총리가 김삼만 회장 회갑 기념으로 드린 ‘기공일생’ 휘호.

◇절약, 절약, 못 한 개도 사용할 곳이 있다

김경서는 자녀들에게 절약과 소박한 생활을 하도록 검소함의 가치도 가르쳤다.

본인도 남이 하찮게 생각하고 버려진 물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렇게 생활함으로써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구차한 삶을 살지는 않아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못 한 개도 분명 사용처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소중히 모아 두었다.

김경서의 이러한 근검과 절약을 유년 시절부터 보고 성장한 김삼만이 훗날 대동공업사를 경영할 때 사훈을 ‘근검, 절약’으로 한 것도 이런 교육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김경서의 성실함과 가정에서의 근검 절약으로 집안의 가세는 조금씩 좋아졌다.

막내 김상민이가 태어날 때쯤은 동네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살림을 이루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 절약

김경서의 근검 생활은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서 생활한 GS그룹 설립의 원조인 지신정 허준과도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허준은 길에 떨어진 종이에서 빈 여백을 오려 메모지로 활용하는 등 특이한 절약 7가지와 오직 사회와 국가를 위한 사용 1가지에 대해 7節1用(7절1용) 모범을 보인 분이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재산의 증식에는 절약이 최선의 방법 중 하나인 것 같다.

김삼만은 “형제 자매들이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검소함을 직접 보고 생활하였기에 7남매 모두 우애가 깊었고, 근면과 성실함이 남달랐다”고 하였다.

◇1920년대 진주

1896년 전국이 13개 도로 구분되면서 경상도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나누어졌다. 이때 진주는 경상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면서 오늘날 도지사에 해당되는 관찰사가 파견되었다.

그후 진주는 약 30년간 경남을 대표하는 도시였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인접한 부산과 마산이 항구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진주보다 더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일본인 사업가들은 두 도시에 진출하여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보호 아래 대부분의 지역상권, 품목상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반해 내륙도시인 진주는 상대적으로 도시 변화가 느리기만 하였다.

두 도시 중 상대적으로 부산항이 일본과 근접하고 대륙으로 진출하는 지리적 위치가 좋았다. 물동량이 늘고 인구가 증가하여 대도시로 성장하자 일본은 한반도 수탈의 거점지역으로 부산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1924년 12월 조선총독부는 진주에 있는 경상남도 도청을 부산으로 옮겨 버렸다.

김삼만 회장은 대동공업에서 자동차를 생산하여 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계획을 가지고 정부 공모에 참여하기도 한 야심찬 경영인이었다. 사진은 대동공업에서 생산한 운반용 차량으로 지난 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촬영했다.
김삼만 회장은 대동공업에서 자동차를 생산하여 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계획을 가지고 정부 공모에 참여하기도 한 야심찬 경영인이었다. 사진은 대동공업에서 생산한 운반용 차량으로 지난 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촬영했다.

김삼만 회장은 대동공업에서 자동차를 생산하여 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계획을 가지고 정부 공모에 참여하기도 한 야심찬 경영인이었다. 사진은 대동공업에서 생산한 운반용 차량으로 지난 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촬영했다.
김삼만 회장은 대동공업에서 자동차를 생산하여 전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계획을 가지고 정부 공모에 참여하기도 한 야심찬 경영인이었다. 사진은 대동공업에서 생산한 운반용 차량으로 지난 여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촬영했다.

◇저항과 열정에서 진주시민은

진주는 사회와 나라에 대한 독특한 민족성의 성격 중 저항의 기력이 강한 지역인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대첩에서 보여준 진주시민의 저력, 1862년 진주에서 시작된 농민운동, 1923년 4월 25일 진주 형평운동 개최, 민족재단에 의해 설립된 사립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단성소 등의 저항과 열정, 민족애가 있는 역사적 사건 기록이 있다.

이렇게 수백 년에 걸쳐 이어온 진주인의 정신은 도청 이전 발표에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도청 이전 사실을 통보받은 진주시민의 분노는 저항과 흥분을 넘어서기도 하였다.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가는 날

진주시민들은 매일같이 궐기대회를 열고 도지사 관사와 전기회사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진주시민들이 도청 이전에 격하게 반대 운동을 하였지만 결국 지키지 못하였다.

약 30년의 진주시대를 끝내고 1925년 경남도청은 부산으로 이전하였다.

부산으로 도청을 보내면서 총독부는 홍수 때마다 유실되고 범람한 진주 남강에 다리 건설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진주 중심부에 위치한 저수지 ‘대사지’를 메워 시가지 환경을 정비하는 등 진주시민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지금의 진주교육지원청과 진주경찰서가 있는 곳이 옛 대사지 터이다.

진주는 1896년 8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부산은 1925년 4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창원은 1983년 7월부터 현재까지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 관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진주성 안에는 안산 혹은 성내동이라 부른 큰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지금은 터로만 남아 있는 선화당이 당시 도청 사무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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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호 (통역·번역가)

이래호 (통역·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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