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김시탁의 전원산책] (11) 고성 장산숲을 찾아서

600년 역사 품은 숲, 구르미 그린 달빛은 박보검이 거닐고 햇살이 세팅한 무대는 녹두전을 부쳤다

기사입력 : 2024-12-19 21:28:20

조선 태조 때 조성… 1987년 경남도 기념물 지정
250그루 나무, 연못·인공섬·정자와 어우러져 운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녹두전’ 촬영지로 인기

퇴계 이황 제자 허천수 배출한 배산임수 ‘장산마을’
‘허씨 고가’ 기와·담장·돌담길은 고풍스런 자태 뽐내
‘디카시’ 신조어 만든 이상옥 교수 집필실은 책향 그윽


깊은 산속이 아니라 마을 앞에서 해풍을 막아줘서

마을이 호적에 올려 마을과 함께 사는 숲이 있다.

이 숲에는 쥐똥나무 그늘로 햇살이 깨금발로 내리고

나무마다 젖을 물려놓고 누워 하늘을 품고 등창이

날지언정 돌아눕지 않는 연못이 있다.

소망이 쌓아 올린 돌탑이 있고 선남선녀가 돌다리를

건너가 연못만큼 깊은 눈망울로 연정을 나누며 함께

바라보기 좋은 섬이 있고 정자가 있다.

햇살과 바람과 연못이 세팅한 무대가 아름다운 곳

계절마다 의상을 새롭게 갈아입고 촬영하는 드라마

는 감독도 연기자도 모두가 장산숲이다 .

대사 한마디 없이 출연하는 고목이고 떨어진 잎들을

받아 제 속에 품은 나무에게 되돌려주는 연못이다.

바람이 쓰고 구르미 그린 달빛이고 녹두전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보다 한 번만 가본 사람은

드물 듯한 내장이 아름다운 장산숲이다.

고성 장산숲. 연못, 인공섬,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김시탁 시인/
고성 장산숲. 연못, 인공섬,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고 있다./김시탁 시인/

◇디카시의 발원지 장산마을과 이상옥 교수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에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명당 장산마을과 그 맞은편에 장산숲이 있다. 필자는 장산마을과 장산 숲을 취재하기 위해 장산마을이 고향인 전임 창신대 문창과 이상옥 교수를 찾았다.

이상옥 교수는 디카시란 신조어를 최초로 만들어 장산마을에서 디카시의 부흥 운동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장산숲에는 디카시의 발원지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고 했다. 창원에서 이 교수를 만나기 위해 미리 일려 준 장산교회 앞에 도착한 건 창원에서 출발하여 1시간이 조금 넘어서였다. 이 교수의 본가는 장산교회 바로 옆에 있었고 본가에 집필실을 마련해 창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푸른 철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넓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고 두 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중 집필실로 보이는 건물에서 이교수가 환한 웃음을 달고 나왔다. 인공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날것의 정원에는 언제 잘랐는지 뽕나무 가지가 자유분방하게 뻗어 있었고 집필실로 들어서는 통로에도 울산 도깨비바늘(도깨비풀)이 금방이라도 바지에 달라붙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 잘랐는지 뽕나무 가지가 자유분방하게 뻗어 있어 일반주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방목의 정원이었다.

사시사철 배경을 달리하는 드라마 촬영지 장산숲.
사시사철 배경을 달리하는 드라마 촬영지 장산숲.

아름답게 보자면 학문과 글쓰기에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거나 자연 그대로가 좋아 내버려 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예사로 보자면 그냥 방치한 정원이었다. 집필실로 들어서니 여기저기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고 중간 테이블에 겨우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이 있어 거기서 차담을 나누었다. 꾸미지 않은 학자의 집필실에는 인쇄서적 향기가 그윽했고 넓은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로 인해 바깥처럼 밝았다. 다기에 차를 끓이는 이 교수의 미소도 온화했다.

◇배산임수의 명당 장산마을과 허씨 고가

이 교수의 도움으로 허씨 고택을 찾았는데 마침 수도권에서 다니러 온 후손 허태래 선생이 집안을 손질하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셨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된 허씨 고가는 조선 말기의 전통적인 한옥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모하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산물이었다. 고풍스러운 기와집에 잘 조성된 정원 장산 숲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빼어난 조망에 심취되어 장산숲의 역사와 허씨 고택에 엃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날씨가 제법 쌀쌀했지만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 포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허씨 고가를 돌아 나오는 고풍스런 돌담길.
허씨 고가를 돌아 나오는 고풍스런 돌담길.

장산마을에는 허씨 고가를 비롯 노산정 그리고 고풍스러운 담장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고택을 나와 돌담길을 걸으며 이 교수는 장산마을의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산은 원래 장산(獐山)의 ‘노루’ ‘獐’(장)으로 마을 후미의 모양이 흡사 노루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여 붙여졌다고 했다. 그런데 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천산재(天山齋) 허천수(許天壽)의 문장이 나라 안에 널리 알려지면서 지명이 노루 ‘獐’에서 글 ‘章’(장)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만큼 허천수의 문장이 빼어났으니 과히 장산마을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이름난 문인을 배출한 셈이다. 아마도 그 정기를 이어받은 이 교수의 시심 또한 장산숲과 뒷산 글산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겨지니 새삼 고향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하겠다.

허씨 고가에서 내려다본 장산숲과 배산임수 명당 장산마을.
허씨 고가에서 내려다본 장산숲과 배산임수 명당 장산마을.

◇유서가 깊고 접근성이 좋은 아름다운 장산 숲

높은 산이라고 다 숲이 울창한 것도 아니고 골이 깊어야만 숲이 깊은 것도 아니다.

나무가 빽빽해야만 숲이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울창하지 않고 깊지 않고 나무가 빽빽하지 않고 더군다나 아담한 규모지만 조화를 이루고 정적인 숲이 있는데 바로 장산숲이다. 이 숲은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장산마을 회관 앞 버스가 다니는 도로변에서 있어 접근성도 좋다. 이 숲은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조선 태조 때 정절공(貞節公) 호은(湖隱) 허기(許麒) 선생이 마을의 풍수지리상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방풍림으로 조성한 비보(裨補) 숲으로 알려져 있으며 1987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허기 선생은 고려 말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만 고성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그 후 신돈을 처벌하고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바로 장산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숲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는 그 길이가 1000m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고 일부는 농경지로 변모되어 길이 100m, 너비 60m, 면적 6000㎡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숲 안에는 연못이 있고 그 한가운데 신선 사상에 바탕을 둔 인공섬을 만들었고 정자도 놓아 숲의 경관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숲의 수종들을 살펴보니 느티나무가 주를 이루고 서어나무, 소태나무, 긴잎이팝나무가 서식하고 있고 검노린재나무, 배롱나무, 쥐똥나무, 팽나무도 눈에 띄는데 대부분 우리나라 남부의 고유 수종들이다. 모두 250그루가 되고 생활환경림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학술적 가치로도 높게 평가될 만하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된 허씨 고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된 허씨 고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된 허씨 고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15호로 지정된 허씨 고가.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과 ‘녹두전’의 촬영지

숲의 외형은 타원형의 전복 모양을 한 형상이며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유구한 역사의 물결을 타고 와서 고목은 웅장하고 장엄하다. 연못은 제 몸보다 넓고 깊은 포용력으로 숲을 다 담고도 모자라 파란 하늘마저 품었다. 숲의 심장과도 같은 연못은 정갈한 자세로 누운 채 나무뿌리마다 젖꼭지를 몰려놓고 등창이 날지언정 돌아눕지 않는다. 연못을 에워싸듯 가지를 뻗은 나무는 제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오래 서 있어서 이제 등이 굽었고 관절마다 군살이 배겼다. 연못 안 작은 섬에는 깍지 발로 내린 햇살이 맨손으로 빚어 놓은 수제비를 채 먹기도 전에 바람에게 빼앗겨 바람의 근육은 싱싱하나 햇살의 체구는 빈약하다. 섬과 어깨를 나란히 한 정자에는 주로 정적이 세 들어 살면서 연인들의 고백을 들어주거나 그들의 희로애락을 추억으로 저장했다가 다시 찾게 되면 기억으로 되돌려준다. 그 기억은 가슴 떨린 첫사랑이었다가 부정맥으로 토해낸 고백이었다가 눈물겨운 이별이기도 하고 기약 없는 언약이기도 해서 간절하고 애달프고 서글프고 벅차다. 그러니 이곳에서 촬영되는 드라마는 주제가 어떻든 애절하고 진솔해서 깊은 울림을 주는 감동이 있다. 대사 한마디 없이 그리움 쪽으로 가지를 뻗은 앙상한 나목은 떨구어 낸 잎들이 안타까워 그림자로 물속에 몸을 던져 떨구어 낸 낙엽들을 도로 건져 올렸다. 젖은 낙엽이 연못에 빠진 나뭇가지에 다시 착착 달라붙었다. 숲에서 촬영된 드라마는 감독도 연기자도 시청자도 모두 계절마다 새롭게 의상을 갈아입는 장산숲이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과 ‘녹두전’ 촬영지 안내판.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과 ‘녹두전’ 촬영지 안내판.

◇국경 없는 디카시의 발원지

이 장산숲 죽사정(竹史亭) 앞에는 디카시의 발원지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상옥 교수는 이 죽사정을 허씨 문중의 승낙을 받아 앞으로 디카시의 연구 및 창작 공간으로 상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상옥 교수는 디카시집 ‘에덴의 동쪽’ 머리말에서 디카시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디카시는 2004년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지역문예운동으로 시작됐다. 디카시는 디지털 환경 자체를 시 쓰기의 도구로 활용해서 스마트폰 내장 디카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감흥)을 찍고 그 느낌이 날아가기 전에 5행 이내로 짧게 언술해서 영상기호와 문자기호를 하나의 텍스트로 소셜미디어를 활용, 실시간 쌍방향 소통하는 순간포착, 순간언술, 순간소통의 극순간멀티언 예술이다.

허씨 후손 허태래 선생과 차담을 나누고 있는 필자.
허씨 후손 허태래 선생과 차담을 나누고 있는 필자.

◇즉석에서 써본 디카시 ‘고목에 눈이 있다’

정확한 수령을 알 수는 없지만 어림짐작으로 봐도 상당히 오래된 고목이다.

겨울에 고사했는가 하면 다시 새봄에 새싹을 틔운다. 딱따구리에 파 먹힌 상처투성이의 몸뚱이 어디를 봐도 온전한 데가 없는데 어느 혈관이 살아 피를 끌어올려 저리도 애절하게 잎을 달고 가지를 뻗었는가. 저 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건 살아있다는 눈물겨운 몸부림의 언어로 쓴 디카시다. 제 몸에 뚫린 구멍은 상처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보는 눈이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눈이다. 바람과 햇살도 심안을 가져야만 그곳으로 드나들 수 있다. 600여년을 안경도 없이 부릅뜬 채 지킨 역사의 깊은 외눈 망울이다.

디카시란 신조어를 만든 이상옥 교수의 집필실.
디카시란 신조어를 만든 이상옥 교수의 집필실.

이상옥의 디카시 ‘장산숲 연못’

‘유년의 하늘과 키 큰 나무들이 인화지처럼 찍혀 있다’는 장산숲.

작아도 아름다운 장산 숲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크게 꾸미지 않아 자연스럽다.

도로변에 있지만 웅장하지 않아 스쳐 지나칠 법도 하지만 숲 속으로 들어와 보면 외형으로 볼 때와 전혀 다른 감동이 몰려온다. 사시사철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니 어느 때 찾아도 색다른 분위기에 젖을 수 있다. 멀리 찾아가지 않아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연령에 상관없이 누구나 부담 없이 도보로 숲과 연못을 감상하며 힐링할 수 있다. 주차장과 화장실이 완비되어 있어 편리하고 숲과 맞은편 명당터 장산마을에 노산정과 허 씨 고가도 관람하며 고풍스러운 돌담길도 거닐 수 있다. 고성 장산 숲은 가본 사람은 적을지 모르지만 한 번만 가보고 다시 가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다. 굳이 따로 장산 숲을 찾지 않더라도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으면 꼭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명소만은 틀림없다.

김시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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