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돌아왔다, 귀향시대] (10) 함안에 살어리랏다
할머니 손맛 이은 ‘고향의 맛’으로 함안을 이어갑니다
더 나은 교육환경 위해 타지 전학
대학서 무역학 전공하며 대회 나가
초기자금 3배 수익 내 성취감 느껴
졸업 후 제조업 해외영업팀 입사
우수 실적으로 법인대표까지 맡아
3년 연속 ‘수출의 탑’ 수상 활약
시간에 쫓기며 여유없는 삶 살다
우연히 할머니 전통 장 매력 빠져
17년간 다닌 회사 퇴직 후 귀향
맛·품질 평준화 위해 연구 매진
“고향 함안 추억·맛 담은 전통 장
다양한 문화·세대 오래 기억되길”
함안을 떠났던 청년은 해외에서의 화려한 커리어를 뒤로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항만 설비 관련 제조업체 해외영업팀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시작해 계열사 대표이사직까지 맡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어느 날 할머니 댁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다. “장에는 사계절이 담겨야 제 맛이 난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바쁜 일상 속에서 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끔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그렇게 운명처럼 전통 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고향 함안에서 이어지는 그의 새로운 길에는 함안을 지역의 청년과 문화, 더 나아가 세계를 잇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지난 13일 전통 장류 제조 업체 ‘아라두레’ 대표인 귀향청년 차미나(40)씨를 만났다.

차미나 아라두레 대표가 함안군 가야읍 소상공인지원센터 내 사무실에서 일정을 정리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미나씨가 함안을 떠난 건 부모님의 교육열에 의해서였다. 사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던 부모님에게 함안의 교육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고, 이는 함안을 떠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이때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던 때였다. 당장의 교육 환경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을 시기였지만,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전학을 가기 전부터 부모님이 타 지역에 집을 먼저 구해 놨던 상황이었어요. 집도 이미 구했고, 나이도 어렸을 때라 부모님의 선택을 따를 수밖에 없었죠. 당시에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 싫었지만, 다양한 교육을 경험하게 하면서 저의 직업 선택지를 넓혀 주려고 했던 부모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크죠.”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사교성 덕분에 전학을 간 학교에서도 곧잘 적응했다. 오히려 함안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문화생활을 접하며 고향을 떠난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별 탈 없이 도시생활에 적응해 나가던 그는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해외펜팔을 통해 외국인 친구들과 연락하며 다른 나라 문화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그는 무역 관련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가 무역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다.
“대학을 다니면서 무역대회를 나갔던 적이 있어요. 당시 30만원으로 한국에서 화장품을 중국에 사들고 가 판매한 후 다시 중국에서 참깨를 사들여와 참기름으로 짜서 시장에 팔았는데, 초기자금의 3배 정도의 수익을 냈어요. 기획부터 도맡아 했었는데 성취감이 크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일이 저한테 잘 맞는다는 걸 느꼈죠.”
미나씨는 대학 졸업 후 항만 설비 관련 제조업체 해외영업팀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시작했다. 입사와 동시에 해외 출장을 가게 됐는데, 특유의 친화력으로 거래처 사람들과 금방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이는 곧 우수한 실적으로 이어졌다. 2015년부터 해외영업팀의 총괄 팀장을 맡은 이후 6년간 그의 손을 거쳐 해외로 수출된 컨테이너 크레인 수량만 56대. 4000만달러 규모에 달한다. 그 사이 회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2018년부터 담당하던 해외영업팀이 계열사로 분리되면서 설립된 법인의 대표이사까지 맡게 된다. 이후 2019년부터는 3년 연속 수출의 탑을 수상하는 성과를 달성하는 등 글로벌 무역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제가 맡았던 해외영업팀의 매출이 커지면서 이 팀을 분리해서 법인을 만들어서 대표를 맡을 정도로 회사로부터 인정을 받았어요. 당시 4000만달러 규모의 컨테이너 크레인 56대 수출은 아시아 최대 기록이었거든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새로운 사람 만나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제 성향이 이 일과 잘 맞았던 거 같아요.”
적성에 맞는 일이 즐겁기는 했지만, 프로젝트 매니저의 업무 특성상 그는 항상 시간에 쫓기며 일을 해야 했다. 해외 입찰에서 통관까지 수출입에 대한 전반적인 업무는 경쟁의 연속이었고, 공사계약 이후 납기 일자를 지키지 못했을 때 하루에 발생하는 지체상금만 수천만원에 달했다. 프로젝트가 여러 개 겹칠 때면 출장에서 돌아와 다시 짐만 싸서 나가는 경우도 다반사. 문득 돌아보니 남은 건 일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부모님 집과 20분 거리였는데, 일이 너무 바빠서 1년 동안 부모님 얼굴을 거의 못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또 주변 친구들은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한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돌아보니까 저한테 남은 건 일밖에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는 마흔다섯이 되는 해에는 꼭 퇴직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른 퇴직은 앞만 보고 달린 지난날의 보상 같은 셈이었다.

차미나 대표가 장독에 담긴 된장을 담고 있다./본인 제공/
어느 날 모처럼 프로젝트를 끝내고 시골 할머니 댁을 찾았던 때였다. 이미 장독대에는 이전에 담가둔 된장이 가득 쌓여 있었지만, 할머니는 어김없이 장을 담그고 있었다. 그가 왜 또 된장을 담그는 거냐고 묻자 할머니는 “장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담겨야 제 맛이 난단다”고 답했다. 된장은 유통기한이 없냐는 물음에는 “사계절이 많이 담길수록 맛이 깊어진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항상 바쁘게만 돌아가는 자신의 세상과 상반되는 할머니의 철학은 그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줬다. 그렇게 마흔다섯 퇴직 이후의 삶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때 할머니의 말씀이 시처럼 들렸어요. 항상 바쁘게만 살다가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두는, 또 그 맛이 더 깊어진다는 말이 너무 인상 깊었거든요. 원래는 퇴직 이후에 별다른 계획이 없었는데, 이날 전통 장의 매력에 빠져서 퇴직 후에 전통 장 만드는 사업을 할 거라고 마음먹었죠. 무엇보다 장은 팔리면 좋고, 안 팔리면 맛이 깊어지니 시간에 쫓길 일이 없잖아요.(웃음)”
한참 후의 얘기가 될 줄 알았던 퇴직 후 장 만들기 계획은 코로나 팬데믹을 맞으며 앞당겨지게 됐다. 그렇게 2022년, 17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두고 함안으로 내려왔다. 그가 전통 장류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할머니 특유의 된장 맛을 살리면서 조금 더 보편적인 맛을 내는 장을 만들어 맛과 품질의 평준화를 위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경상국립대 최고농업경영자 과정에 입학해 미생물을 활용한 발효를 공부하며 할머니의 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할머니의 된장에서 맛과 향을 내는 유익한 균주를 분리·배양해 제조 방법을 정형화하고, 현대식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차미나 대표가 협력 업체 연구실에서 할머니의 씨된장 종균을 분리하고 있다./본인 제공/
“사업을 준비하는 동안 할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어요.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그 어느 해의 사계절을 담았던 씨된장의 종균이 할머니 된장의 향과 맛을 이어지게 해준다는 점에서 제가 만드는 된장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이제는 돌아가신 할머니를 추억하는 수단이기도 하거든요. 지금은 제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초기 단계인데,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본 후 성적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제품 출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미나씨는 해외영업팀 프로젝트 매니저로 십수 년간 근무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에 닿을 수 있었고, 반대로 다른 나라 사람에게 한국의 문화를 닿게 했다. 이런 문화의 공유는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게 하는 힘을 가진다. 할머니의 장맛을 계승 중인 그가 회사 슬로건을 ‘함안을 잇다’로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전통 장류 사업을 통해 함안을 다른 도시와 잇고, 젊은 세대와 잇고, 세계와 이으며 ‘연결’과 ‘상생’을 목표로 ‘아라두레’를 키워나갈 생각이다.
“말레이시아 주재원 파견 시절에 택시를 자주 탔었는데, 라디오에서 소녀시대 노래가 나오고 있었어요. 당시에는 K-POP이라는 용어가 있기도 전이고, 스마트폰도 보편화되기 전인데, 젊은 택시기사가 발음도 어려운 소녀시대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기사가 한글도 모르고 소녀시대 노래를 따라 부른 것처럼 사람들이 아라두레 이름의 뜻은 모르더라도 제가 만든 장이 하나의 음식 또 하나의 문화로서 공감을 받으면 너무 기쁠 거 같아요. 함안의 포근함을 담은 향이, 따뜻함을 담은 한국의 맛이 다양한 문화와 세대에게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차미나 대표가 개발한 콩알메주.

차미나 대표가 함안군 가야읍 소상공인지원센터 내 사무실에서 콩알메주가 담긴 병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함안군 청년정책= 함안군은 청년인구의 지역 정착과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결혼, 출산, 주거, 일자리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청년의 결혼과 출산을 지원하는 △신혼부부 결혼장려금(2025년 신규시책으로 상반기 시행) △출산장려금 △첫만남 이용권 △초등학교 입학 축하금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청년과 신혼부부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주거 지원책으로는 △청년 월세 지원금 △신혼부부 주택구입 대출이자 지원사업 등이 있으며, 관내 청년근로자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지원하는 △함안정착 청년통장사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청년들의 경제적 자립을 도와 청년들이 함안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일자리 관련 지원 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청년 농업인 육성 및 안정적 정착 지원을 위한 △영농정착 지원사업 △취농직불제 사업 △커뮤니티 활성화 지원 사업과 청년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청년일자리 우수기업 지원사업 △경남형 DNA 시드인력 양성사업 △경남 청년인재-주력산업 동반성장 일자리사업 △청년 일경험 지원사업 등을 운영하고 있다.
☞ 아라두레는?
삼국시대 함안의 지명이었던 아라가야의 ‘아라’와 농민들이 농번기에 농사 일을 공동으로 하기 위해 부락이나 마을 단위로 만든 조직을 뜻하는 ‘두레’를 결합한 합성어다. 함안을 다양한 지역과 세대를 이어 함께 상생하는 기업을 만들기 위한 차미나 대표의 의지가 담긴 회사명이다.
김영현 기자 kimgija@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