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79주년 특집] 창원 다호리 역사로 향하는 길 (上) 찬란했던 다호리
‘기원전 1세기 붓’ 출토... 한반도 문자문명 시작점
1960년대 공업용수관 매설 때 유물 쏟아져
도굴꾼 구릉지 등에 전등불 켜고 밤새 작업
국립중앙박물관 1988년 3월 첫 발굴 시작
BC 1세기 붓 등 청동기~철기 유물 다량 출토
민간 주도 고분군축제·문자문명전 등 열려
지자체 역사·문화적 가치 재조명 나서야
원삼국시대 대표유적 ‘창원 다호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호리 붓’은 한글로 완성된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자 문명의 출발점이다. 역사는 곧 우리의 뿌리라고 한다. 가장 깊은 뿌리를 가진 ‘다호리 이야기’를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기록해야 할까.
경남신문은 창간 79주년을 맞아 다호리 유적이 가진 역사성과 가치를 조명하고 앞으로 다호리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2부에 걸쳐 다룬다.

창원 다호리 1호묘에서 출토된 붓 세 자루와 손칼./국립중앙박물관/
한국 고고학계에는 창원 의창구 동읍에 위치한 다호리 고분군을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불렀다. 그곳은 고대국가의 비밀을 풀어낼 열쇠였다. 다호리의 위대한 발견, 그 후로 40년이 흐른 우리는 다호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1987년 10월 도굴 제보를 받은 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장이 발견한 도굴 뒤 흙더미.
◇새로운 역사를 발견하다= 1987년 10월 13일 오전, 의창군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이는 군 공무원으로 그날 당직을 섰던 양해광(현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75)씨다. 유선으로 지금의 다호리 고분군이 위치한 부지에 쌀 농사를 짓던 논 주인의 성토가 전해졌다. “수확을 다 끝마친 논을 누가 파헤쳐서 도굴을 했다고 전화가 왔는기라. 그래서 쫓아 나가보니까 진짜 도굴 흔적이 있고.”
다호리 일대는 역사의 보고(寶庫)였다. 1960년대 다호리에 공업용수관을 매설하던 당시 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그때 사람들이 그게 귀한건지도 몰랐고, 예사였지요. 아들은 그거 주워서 고물상에 주고 엿이나 바꿔 먹고. 고물상이 얻어낸 그 유물들은 서울 인사동으로 모인 거지.”
마을에는 유물이 일제시대부터 도굴됐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공업용수관을 매설하던 당시 과거 일본에서 유통되던 동전들이 유물과 함께 섞여 나왔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 도굴하던 놈들이 동전을 흘렸을 것 아니냐. 이런 얘기가 밖으로 나가니 수시로 도굴꾼들이 와서 땅을 파내기 시작한거고.”
밤에는 인근 야산과 구릉지역 여기저기서 도깨비불처럼 등이 떠오르곤 했다. 도굴꾼들이 작업을 하기 위해 밝힌 전등불이었다. 당시에는 경찰에 신고했어도 도굴 사건이 너무 많아 잡아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다호리에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호리’가 도굴꾼들의 도굴 장소에서 국가 사적으로 보호받게 된 시작점이다. 1988년 3월, 첫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발굴 현장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속 학예연구사였던 임학종 전 국립김해박물관장도 있었다. “도굴꾼들이 기다란 쇠침으로 찔러보고 파낸 흔적으로 천지가 그런 흙무더기였습니다. 7차 발굴조사까지 대부분이 도굴꾼들이 도굴한 구덩이를 따라다니면서 발굴하는 것이었죠.”
모두가 새로운 역사를 발견했다는직감을 가졌다. 첫 발굴부터 삼한시대 통나무로 만든 구유형 목관인 ‘통나무 목관’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목관묘가 발견된 것은 다호리 고분군이 처음이었다.

1998년 3월 다호리 고분군에서 진행된 발굴조사 장면./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장/
◇청동기와 철기가 만난 시대, 문자문명의 시작= 국립중앙박물관은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총 8차에 걸쳐 다호리 고분군의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이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2014년까지 4차례 추가 조사해 총 12차 조사가 진행됐다.
고분군에서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직후까지 이어지는 청동기, 철기, 칠기류의 무기와 장식, 농·공구류 등이 쏟아졌다. 다호리 고분군이 가진 의미에 대해서 임 전 관장은 “완성된 철기와 칠기, 붓과 중국 화폐였던 오수전(五銖錢), 와질토기의 발견”이라고 되짚는다.
삼한(三韓)은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의 접점으로 알려졌다. 단품 철기에 그쳤던 이전 유물과 달리 다호리에서는 목공구, 무구, 어구, 마구 등 철기가 완성된 양상이 드러났다. 즉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철기 단조품 주조품이 발견된 것이다.
와질토기는 노천가마에서 구웠던 신석기시대 사용된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나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민무늬토기)와 달리 정선된 점토로 성형해 밀폐된 가마를 만들어 그 속에서 고온으로 구워낸 토기다. 투박한 토기들과 달리 좌우의 형태가 동행해 회전판을 사용한 기술적인 결과물이다. 당시 한나라와 연나라의 제작 기술과 같다.
다호리 붓은 기원전 1세기부터 문자가 사용됐음을 알리는 첫 증표가 됐다. 붓과 함께 손칼(삭도)이 함께 발견됐는데, 나무판에 붓으로 문자를 작성하고 다시 쓸 때는 손칼을 이용해 지워냈던 것이다. 즉 지금의 연필과 지우개 같은 역할이다.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붓이다.
붓대에는 흑칠이 되어 있는데, 이와 함께 각종 용기류, 무기류, 농공구류 등에서 다양한 칠기들이 발견됐다. 제작기법들이 중국제 칠기와 계통이 다르며 독창적인 칠기문화 전통이 이뤄졌음이 유추된다.
다양한 유물과 흔적들로 말미암아 철기생산을 바탕으로 한(漢)·낙랑(樂浪) 등과 활발한 교역을 이뤄가며 독자적인 전통 문화를 꽃피운 상당한 정치세력이 다호리에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난 2009년 시작된 문자문명전에서 김종원 서예가가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김종원 서예가/
◇찬란했지만 외면받는 ‘다호리’= 지난 2008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호리 유물을 공개하는 ‘갈대밭 속의 나라, 다호리-그 발굴과 기록’ 특별전을 펼쳤다.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1~8차 발굴조사의 결과를 보이는 자리였다. 최초로 공개된 통나무 목관과 변한의 철기 등에 국제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전시가 끝난 2009년부터는 ‘다호리 붓’을 주제로 창원에서 ‘문자문명전’이 시작됐다. 김종원 서예가와 같은 지역 예술가와 기업인 등의 주도로 시작된 문화 행사였다. 문자문명전은 아시아문화권에도 관심을 받으며 중국과 일본에 교류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 서예가는 400여년 전 다호리에 정착해 마을을 형성했던 연안김씨 종손이다. 다호리에 뿌리를 둔 주민이자 서예가로 ‘다호리 붓’의 출토에 운명적인 만남을 느꼈다. 그는 “한반도 문자문명의 시작점이 이곳 다호리였다는 것에 깊은 의미를 느꼈다. 단순히 역사유물로 볼 것이 아니라 유물이 당시에 가졌던 문명사적인 의미를 되살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부터 농림수산식품부의 농어촌축제로 선정된 ‘다호리고분군축제’가 열리기도 했다. 다호리 마을 주민들이 주도해 다호리 고분군을 주제로 향토고분 발굴 등을 메인 프로그램으로 내세워 진행했지만, 사업 지원이 끝난 이후로 동력을 얻지 못해 다호리고분군축제는 2016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문자문명전은 지금도 창원에서 다호리를 주제로 열리는 유일한 연례 콘텐츠다. 이마저도 민간에서 주도하는 시의 공모사업이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집중받았던 ‘다호리 역사’가 정작 지자체에서는 외면받고 있는 셈이다.
김종원 서예가는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진 것이 다호리의 역사”라며 “창원시민의 물질적 풍요에 버금가는 정신사적 자부심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자체가 나서 다호리를 조명할 콘텐츠를 생산하고 양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태희 기자 ttott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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