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위한 헌신,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24) ‘영원한 해병’ 김학상씨
앞 보이지 않아도 빗발치는 포화 속으로 뛰어든 ‘무적 해병’
아버지 일찍 여의고 막노동하며 학비 벌어
마산상고 1학년 재학 중 6·25전쟁 터져
친구집 갔다 경찰에 잡혀 얼떨결에 입대
진해서 훈련 받고 격전지 동부전선 투입
1952년 임진강 86고지서 수차례 탈환전
수류탄·대검으로 전투… 화랑무공훈장 받아
휴전 후 해병대 교관 생활·월남전 참전
“유공자회 존속 위해 유족도 가입시키고
미래세대 위해 보훈 제대로 이뤄져야”
그의 삶은 ‘해병’이었다. 김학상(91)씨는 해병으로 6·25전쟁과 월남전에 참전했다. 뜻하지 않게 군인이 되어 20년 넘게 군복무를 했다. 지난 2일 유공자회 진해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본지에 보도된 참전 영웅들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기획 마지막 인터뷰가 오늘이라고 전하자 그는 고생했다며 어깨를 다독였다. 이날 그를 만나지 못했으면 잊힐 역사가 많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흙먼지로 인해 총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수류탄과 대검으로 적과 싸웠다. 종이 한 장에 빼곡히 적힌 군 생활 기록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경남 참전 영웅을 찾아서’ 기획 보도 마지막 주인공인 김학상씨를 만나 해병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김학상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해병 제1전투단 소속으로 김일성 고지에서 인민군과 벌어진 고지전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을 감고 있다./김승권 기자/
◇친구 집 놀러 갔다가 붙잡혀 입대= 산청에서 태어난 그는 마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큰형 집에 살던 그는 막노동하며 학비를 벌었다. 힘들게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초기 한반도 남단인 마산 시민들은 곧 종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컸다. 그도 별생각을 하지 않던 중 8월 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경찰에 붙잡혀 그 자리에서 입대하게 된다. 그의 가족들도 이 사실을 몰랐다.
“경찰이나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 잡아간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저 같은 학생도 잡아갈 줄 몰랐죠. 마산에서 기차 타고 진해 훈련소로 가 해군으로 입대했어요. 뒤늦게 이 소식을 안 가족들은 울고불고 난리 났다고 하더군요.”
얼떨결에 군인이 된 그는 해군 제17기로 훈련소에 입소한다. 한 달여 훈련은 생지옥이었다. 매일 밤 교관들의 폭행은 일상이었다. ‘1분 식사’라고 해서 밥을 1분 이내에 먹어야 하는 훈련도 했는데 어린 학도병들에게는 고역이었다. 1분 안에 식사를 마치지 못한 훈련병들은 모자에다가 밥을 넣어 화장실에서 먹기도 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찾아 먹었다. 그러다 교관에게 잡히면 두들겨 맞았다. 그는 당시 훈련병들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전했다.

김학상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해병 제1전투단 소속으로 김일성 고지에서 인민군과 벌어진 고지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흙먼지 속 수류탄 들고 싸웠다= 9월 15일 수료 후 진해에서 해군 경비대 소속으로 근무했지만, 해병대로 전환돼 목포에 배치됐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미처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된다. 이어 백령도에 잠시 근무한 뒤 해병 제1전투단 소속으로 치열한 고지전이 펼쳐지던 동부전선(펀치볼)으로 가게 된다.
펀치볼은 전쟁 중 최대 격전지로, 아군과 적군이 이곳을 갖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른 곳이다. 외국인 종군기자가 해안분지 아름다운 풍경이 화채그릇(Punch Bowl)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펀치볼 북쪽으로 1026고지(모택동고지), 924고지(김일성고지), 서쪽으로 가칠봉고지(1242m), 대우산고지(1178m), 남쪽 도솔산(1304m), 918고지 등 1000m 전후 산봉우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김일성고지에 주둔해 방어전에 투입됐다. 200여m 앞 모택동고지에는 인민군 진지가 있었다고 그는 떠올렸다. 1951년 8월부터 9월 말까지 치러진 펀치볼 전투에서 한미연합군은 1000여 명, 인민군은 1만여 명 사상자가 발생했다.
고지에서 인민군을 교란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매복해 있던 때를 잊지 못한다. 그의 부대는 교란작전을 위해 고지에 주둔했지만, 참호 안에 숨어 불도 피우지 못한 채 숨어 있었다. 움직임이 인민군에 들키면 안 되니 건빵으로만 생활했다. 인민군은 국군이 철수한 줄 알고 고지 점령을 시도했고, 일주일간 몸을 숨기고 있던 국군은 총공격에 나섰다.
“하루도 아니고 일주일 동안 한 곳에 숨어서 건빵만 먹고 기다렸다는 게 상상이 되나요? 인민군들은 저희가 없는 줄 알고 왔다가 도망치던 게 잊히지 않네요. 많은 전우의 희생으로 모택동고지를 점령해 전투가 승리로 끝났죠.”

김학상 6·25 참전유공자가 취재진에게 이야기할 내용을 적은 전투경력 메모.

김학상 6·25 참전유공자가 1951년 해병 제1전투단 소속으로 김일성 고지에서 인민군과 벌어진 고지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1952년 봄 그의 부대는 서부전선으로 이동한다. 임진강 근처인 155고지, 86고지에 주둔한 그의 부대는 휴전이 될 때까지 진지를 방어하는 게 주된 목표였다. 고지에는 전투 중 수많은 포탄이 떨어져 나무는 하나도 없었고, 흙은 마치 모래처럼 부스러졌다. 점령하기 위해 돌격하면 군화가 흙에 ‘푹’ 빠졌다.
그렇다 보니 전투가 시작되면 흙먼지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소총에 흙이 들어가 제대로 발사가 되지 않아 군인들은 수류탄과 대검으로 적과 싸웠다. 적과 아군이 수류탄을 던지는 가운데 고지는 흙먼지와 비명으로 뒤덮였다.
국군은 한 명당 2~4개 수류탄이 지급됐다. 이 수류탄을 다 쓰면 중공군이 후퇴할 때 놓고 간 ‘방망이 수류탄(멀리 던질 수 있게 손잡이를 붙인)’을 사용했다.
필사적으로 고지를 점령해 올라가니 어린 인민군 소년병이 철사에 묶여 기관총을 붙들고 있었다. 수류탄 파편에 맞아 소년병은 곧 숨이 끊어졌다. 퇴각 시간을 벌기 위해 소년병을 묶어 기관총을 쏘게 한 것이다.
“전투할 때 포탄과 수류탄이 쉴 틈 없이 터지니 ‘왕! 왕’ 굉음만 들렸어요. 수류탄은 떨어지고 나서 3초 안에 터집니다. 제 앞에 떨어진 수류탄을 다시 던져 간신히 산 적도 있어요. 제 나이 또래 되는 인민군 병사들을 볼 때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전쟁이란 게 대체 뭔지….”
적들은 고지를 빼앗기면 국군이 만든 참호를 향해 직사포를 쏘거나 야밤에 철조망을 부쉈다. 국군은 맨몸으로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휴전 직전까지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김씨. 그의 부대는 마지막까지 뺏기 위해 투입됐던 86고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해당 고지는 낮에는 아군이 점령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있었다고 한다. 하루에만 고지 주인이 4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치열했다. 전투가 끝나고 보니 분대원 14명 중 7명만 살아 있었다. 그는 전투에서 용감히 싸운 공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김학상(오른쪽) 6·25 참전유공자가 창원시 진해구 6·25참전유공자회 진해지회 사무실에서 손담 지회장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영원한 해병= 그는 휴전 이후 진해에서 해병대 교관으로 군 생활을 이어갔다. 1968년부터 1년간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보급중대 선임하사로 참전한 그는 실제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베트남 간다고 할 때 자식들도 있었어요. 먹고살아야 하니 자진해서 지원했죠. 월남전 가면 다 죽는다는 소문이 돌아서 다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귀국 후 1970년 해병사관후보생학교에 입교해 준위로 임관한다. 1973년 해병대와 해군이 통합하면서 그는 23년간의 해병 생활을 마친다. 제대 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
그의 마지막 바람은 6·25 참전유공자회 존속을 위해 유족들도 회원이 되게끔 하는 것이다. 참전 유공자들의 평균 연령이 93세에 이르며, 매년 30%씩 회원이 줄고 있다. 앞으로 3~4년 후에는 참전유공자회가 사라질 수 있다.
“광복회와 광주민주화운동 단체처럼, 유족들도 가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6·25전쟁도 그렇게 해야 앞으로 미래 세대들이 전쟁을 기억할 수 있죠. 제대로 된 보훈이 이뤄져야 전쟁이 터져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청년들이 나올 겁니다. 이 말은 정부가 꼭 명심했으면 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밥 한 끼 사겠다고 취재진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그는 콜라 건배를 제의하며 “50년, 100년 뒤까지 전해질 유공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줘서 고마워요. 필승.”이라고 외쳤다.

김학상 6·25 참전유공자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박준혁 기자 pjhnh@kn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