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건축기행- 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23)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

절벽 위 풍광 품고 수백년 역사와 동행해온 ‘목조건축의 정수’

기사입력 : 2024-12-10 08:11:56

남강변에 장엄히 자리 잡은 ‘진주 촉석루’
전쟁 때 지휘소, 과거시험·연희 장소로 활용
6·25전쟁 중 전소, 국보 해제… 재지정 노력

밀양강변에 굳건히 솟은 ‘밀양 영남루’
풍경 감상 외 숙박·행정 겸한 다기능적 누각
1962년 보물 지정… 지난해 국보로 승격

닮은 듯 다른 매력
빼어난 경관으로 많은 문인들의 사랑 받아
본루·지붕형식 비슷, 상부가구 구성서 차이



한국의 전통 누각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자연과 역사를 품은 문화적 공간이다. 경남은 조선시대 3대 누각 중 두 곳을 품고 있다. 바로 진주시 촉석루와 밀양시 영남루다. 두 누각은 남강과 밀양강의 절벽 위에 자리잡고 수백 년간 한반도의 풍경을 지키며 웅장한 목조 건축의 정수와 깊은 역사를 간직해왔다. 이번 건축 기행에서는 각기 다른 매력으로 방문객을 매료시키는 두 누각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는 누각이 품고 있는 건축적 미학과 함께 켜켜이 쌓여 있는 우리 역사와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촉석루는 진주시 진주성 지휘본부로 활용된 누각 건물로 남강변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다.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
촉석루는 진주시 진주성 지휘본부로 활용된 누각 건물로 남강변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다.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

◇남강 위에 서린 의로움과 풍류, 촉석루= 진주시 젖줄인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장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지휘본부로 활용된 누각 건물이다. 절벽 위 건립돼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빼어난 입지를 갖추고 있는 동시에 전시엔 지휘소,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

촉석루라는 명칭은 절벽 위에 솟은 모습에 유래된 이름으로, 창건한 사람들의 장원급제를 빗대어 장원루라고도 불린다.

촉석루는 전시시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김승권 기자/
촉석루는 전시시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김승권 기자/

촉석루는 1241년 진주 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이후 조선시대와 근현대를 거쳐 여러 차례 보수·정비가 진행됐다. 지속적인 보수를 통해 촉석루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1948년 국보로 지정됐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전소되면서 국보에서 해제됐다.

1956년 진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촉석루 중건이 추진됐으며, 국비, 도비, 시비, 시민성금 등 민관이 협력해 1960년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을 갖춘 건물로 복원됐다. 현재 촉석루는 경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가운데, 진주시에서는 국보 승격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촉석루는 전시시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김승권 기자/
촉석루는 전시시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장, 연희 장소 등으로 쓰인 복합적 건축물이다./김승권 기자/
촉석루는 진주시 진주성 지휘본부로 활용된 누각 건물로 남강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다./김승권 기자/
촉석루는 진주시 진주성 지휘본부로 활용된 누각 건물로 남강 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다./김승권 기자/

촉석루의 지붕은 7량가 형식으로 가구부가 구성돼 있으며, 공포는 1출목 3익공으로 조선시대 대형 누각의 특징적인 형태로 구성돼 있다. 문헌에 따르면 촉석루 역시 영남루와 동일하게 4개의 부속시설(익루)를 갖춘 대형 누각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전부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촉석루는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다웠던 만큼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전해져 오고 있다. 촉석루 내부에는 하륜의 ‘촉석루기 (矗石樓記)’를 비롯한 많은 현판과 시판이 걸려 있다.

촉석루 서쪽으로는 논개 영정과 위패를 모신 의기사, 동쪽으로는 촉석문과 촉석루 삼문이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임진왜란 때 전사한 충혼을 기리기 위한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조성돼 있으며, 남쪽으로 남강과 의암(義巖)이 있다.

조선 후기 시인 신유한은 촉석루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진양성 바깥엔 강물은 동으로 흘러가고/ 울창한 대 꽃다운 난초는 푸르러 모래섬에 비치도다/천지엔 충성 다한 삼장사가 있었고/강산엔 객을 머물게 하는 높은 누각 우뚝 섰네/병풍치고 노래하니 햇살에 잠자던 교룡은 춤추고/병영 막사에 서리 들이치니 졸던 해오라기 수심 깊네/남으로 북두성 바라보니 전쟁 기운은 사라졌고/장군단엔 피리 불고 북 치며 중춘에 노닌다네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 객사의 일부로 사용된 누각 건물로 밀양강 돌벼랑 위에 있다. 경관 감상 공간을 넘어 숙박·행정을 겸한 다기능적 건축물로 진화했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 객사의 일부로 사용된 누각 건물로 밀양강 돌벼랑 위에 있다. 경관 감상 공간을 넘어 숙박·행정을 겸한 다기능적 건축물로 진화했다.

◇밀양강 위에 솟은 조선의 명루, 영남루= 밀양시의 한복판을 흐르는 밀양강의 돌벼랑 위 우뚝 솟아 있는 영남루는 세월의 무게를 한몸에 지니고 굳건히 서있다. 동쪽으로는 아동산, 남쪽으로는 넓은 들판과 밀양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경관을 자랑한다.

이러한 위치적 장점 덕분에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 객사의 일부로 사용되며, 관영 누정으로서의 역할을 겸했다.

영남루는 1365년 밀양 지군(知郡) 김주가 영남사라는 사찰의 옛터에 누정을 짓고 영남사의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명명했다고 한다.


영남루의 빼어난 경관으로 인해 역사적 명사들은 수많은 시문을 남겼다.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은 이미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의 시판이 남아 있다. 주요 편액은 영남루 북쪽 처마에 걸린 세 개의 대형 편액으로, 조윤형이 쓴 ‘영남루(嶺南樓)’가 중앙에, 이유원이 쓴 ‘강좌웅부(江左雄府)’와 ‘교남명루(嶠南名樓)’가 각각 좌우에 걸려있다. 이 밖에 이인재 부사의 아들 이현석이 7세 때 썼다는 ‘영남루(嶺南樓)’도 눈에 띈다.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대루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침류각, 서쪽에는 능파각,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여수각이 배치돼 있다. 이 독특한 배치는 누각을 단순한 경관 감상의 공간을 넘어, 숙박과 행정을 겸하는 다기능적 건축물로 진화시켰다. 특히 건물 서편의 층층각 지붕이 여러 단으로 낮아지면서 침류각과 연결돼 독특한 외관을 구성한다.

영남루는 단순한 경관 감상의 공간을 넘어, 조선시대 숙박과 행정을 겸하는 다기능적 건축물로 진화했다./김승권 기자/
영남루는 단순한 경관 감상의 공간을 넘어, 조선시대 숙박과 행정을 겸하는 다기능적 건축물로 진화했다./김승권 기자/

영남루 역시 촉석루와 마찬가지로 수차례 재건과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7세기 초에 재건됐다. 또한 1834년에는 큰 화재로 전소되면서 1844년 부사 이인재가 중건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특히 이 시기 대루의 규모를 확장하고, 능파각과 침류각, 여수각을 함께 복원하면서 건축적 완성도를 높였다.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 객사의 일부로 사용된 누각 건물로 밀양강 돌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다./김승권 기자/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 도호부 객사의 일부로 사용된 누각 건물로 밀양강 돌벼랑 위에 자리잡고 있다./김승권 기자/

영남루는 1933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해방 후인 1955년 국보로 승격됐다. 이후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를 재평가하면서 보물로 바뀌었고 지금껏 이어져 왔다. 그러다 지난해 국보로 승격됐다.

조선 초기 문신 이원은 영남루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광을 시 속에 이렇게 풀어냈다.

우뚝한 누각 영남 하늘에 높이 올려놓아서/십리의 빼어난 경치 눈앞에 다 보이네/고요한 낮 여울 소리 베갯머리에 이어지고/해 비끼자 솔 그림자 뜰 가에 떨어진다/농부의 바쁜 봄 일 마을마다 비 내리고/들 객점엔 아침밥 짓느라 곳곳이 연기로다/지난날 선군께서 이곳을 지나셨는데/부끄럽다 소자가 다시 잔치 여는 것이

진주 촉석루. /김승권 기자/
진주 촉석루. /김승권 기자/

밀양 영남루. /김승권 기자/
밀양 영남루. /김승권 기자/

◇닮은 듯 다른 매력= 촉석루와 영남루 본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 팔작지붕, 2고주 7량가 형식, 1출목 3익공 형태로 구성돼 있는 점이 유사하나 상부 가구 구성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촉석루는 대들보가 정면과 배면 기둥과 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들고, 높은 안기둥(내진고주)으로 보강하는 구성이다. 영남루는 내부 높은 기둥(고주)이 대들보를 받고 정면과 배면 툇간은 툇기둥과 안기둥에 얹는 짧은 보(퇴량)로 고주와 일정한 형태로 얼개를 만드는 방식을 채택했다.

촉석루는 1752년, 영남루는 1844년 중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같은 차이는 시대적·경제적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촉석루 중수 당시 국가적 지원 등을 통해 대형 목재 수급이 가능해 단순하게 구조를 구성하는 흔하지 않은 수법을 썼고, 영남루는 비교적 목재 수급이 용이하고 내부를 높게 구성할 수 있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형식을 지니고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촉석루와 영남루는 세월의 흔적을 간직하며 우리 곁에 서 있다. 이곳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도 문화적·역사적 영감을 주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두 누각 위에 올라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특별한 공간의 숨결을 느껴 보길 바란다.

글= 한유진 기자·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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