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ON- 김홍섭의 좌충우돌 문화 유산 읽기] (13) 통영 백운서재
통영엔 천지만물 꿰뚫는 ‘조선의 도사’ 백운 선생 흔적이…
만민에 인생의 배움을 가르쳤던 백운 고시완 선생 넋 기린 백운서재
소박한 백운암·아담한 연못과 영모사… 담장 너머엔 서민들의 골목
손 한번 움직여 공부 방해되는 개구리 울음 단번에 그치게 한 일화도
조선에 귀신을 마음대로 부리며 천지만물의 흐름을 꿰뚫고 도술을 하는 이가 다섯 명 있었다고 전해진다.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 백운 고시완 그리고 그 유명한 전우치와 홍길동이다. 이 중 전우치와 홍길동은 사실 실존인물임을 증명하기 어렵다. 실존과 비실존의 경계인물이다보니 오히려 전우치와 홍길동의 도술과 귀신 부리는 솜씨는 거칠 것 없는 판타지 수준이다. 정확한 기록을 통해 실존인물임이 확실한 사람은 개성의 화담 서경덕 선생과 서울의 토정 이지함 선생 그리고 통영의 백운 고시완 선생이다. 통영의 달동네에서 선생의 자취를 찾았다.

백운 고시완 선생이 가난한 집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던 서당 ‘백운서재’ 입구./김홍섭 소설가/


◇백운서재 가는 길
백운서재는 통영 도천동 시내에 있다. 어딘지 알고 가지만 실제로 찾기는 쉽지 않다. 통영 여황로를 따라 통영대교를 향해 진행하다 보면 양 옆으로 오래된 주택가가 나온다. 조금 가면 앞에 당동교라는 고가도로가 보인다. 고가도로 진입 전에 오른쪽으로 산비탈을 타고 오르는 오래된 집들이 보인다. 한눈에도 ‘달동네’다. 그리고 오른쪽 샛길이 보이고 ‘대교회도매시장’이라는 간판도 있다. 샛길로 들어서는데 몇 명의 여성이 붉은 조끼를 입고 청소를 하는 중이다. 차에서 내려 길을 물으니 한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손짓으로 안내를 해준다. 주차할 공간까지 알려주었다.
좁은 골목길 입구를 보며 차가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들어서니 넓어진다. 당동교 고가도로 아래쪽이 주차장이다. 주차를 하고 조금 걸어 나오면 왼쪽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이 있다.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머리가 좀 복잡해진다. 이런 거미줄 같은 좁은 골목 안에 도저히 백운서재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집집마다 붙어 있는 주소지는 ‘백운서재 1길’이니 잘못 들어온 건 아닌 것 같다.

백운서재 가는 골목길
골목은 아주 좁다.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정도. 들어서자마자 시작되는 가파른 비탈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해발 257m 천암산 줄기의 끝자락이 가파르게 깎아지른 모양으로 내려와서 바다와 만나는 곳이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골목을 따라 줄지어 있는 모습은 약간 정겹기는 하다. 다만 골목은 텅 비어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항구도시에서는 바다를 기반으로 의식주를 해결한다. 피란 때 내려왔거나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도시의 야산 빈 땅에 모여들어 하나씩 집을 짓다 보면 달동네 골목길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계획을 하고 짓는 게 아니다 보니 한 사람이 집을 지으면 그다음 사람이 덧대어 짓고 그런 식으로 사람 사는 동네를 넓혀간다. 그러다 보니 골목은 구절양장으로 끊임없이 구부러지고 이어지며 삶의 흔적을 만들어간다. 그 흔적만으로도 서민들의 힘든 삶의 궤적을 느끼게 된다.

백운서재 돌담길
몇 갈래로 갈라지는 골목이 길 모르는 사람을 심란하게 만든다. 일단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한참을 오르다 보니 왼쪽 건너편 위로 기와가 보였다. 근사한 돌담도 보인다. 되돌아 내려와서 왼쪽 골목으로 다시 들어선다. 이 길은 더 가파르다. 앞을 보고 올라가면 골목이 갑갑하지만 잠시 뒤돌아보면 툭 터진 바다풍경이 그럴 수 없이 시원스럽다. 얼마 가지 않아 가파른 골목의 옆으로 더 가파른 돌계단과 좁은 계단에 맞춰 지은 좁은 대문이 보이고 대문엔 ‘白雲庵’이라고 편액이 걸려 있다. 찾았다.

백운암 뜰의 동백
◇경남문화재자료 제9호 백운서재
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관리하는 분이 거주하는 기와채가 하나 있다. 방문한 날은 못 만났지만 노부부가 살고 있다고 한다. 왼쪽이 백운서재다. 백운 고시완 선생이 21세가 되는 해(1803년)에 이곳에 터를 잡고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끌어와 뜰에 작은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마당가에 커다란 두 그루 동백나무와 담장 주변의 노거수들만 덩그렇게 서 있다. 동백나무를 많이 보았지만 이처럼 아름드리 동백은 처음이다. 서재의 툇마루에 앉으면 제일 먼저 눈에 드는 것이 동백이고 그다음이 돌담이며 그 너머로 통영항 푸르게 물결치는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백운암
‘백운암’ 편액이 걸린 현재의 건물은 1928년에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 지붕으로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1칸씩 있다. 말이 ‘대청’이지 워낙 소박한 건물이다 보니 실제 크기는 쪽마루나 다름없다. 그리고 옆으로 연못이 있고 연못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건물은 ‘영모사(永慕祠)’로, 선생의 제사를 모시는 곳이다. 이 지역 유림이 매년 음력 8월 말 정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영모사 앞의 연못과 샘,

영모사 옆 샘
백운암 처마 아래 좌우로는 白雲山房(백운산방), 白雲庵(백운암), 川谷精舍(천곡정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가운데에 對月灘(대월탄) 편액이 걸려 있다. 그리고 무자년(1828년) 여름 무계노부라는 호를 쓴 이가 고시완 선생을 위해 지은 시도 단정하게 걸려 있다.
竹陰滿?石泉鳴(죽음만체석천명) 대 그림자 섬돌까지 드리우고 바위틈 샘 소리 들리네
遠客登亭邀月明(원객등정요월명) 멀리서 찾아온 손님은 정자에 올라 밝은 달빛 맞이하네.
傍市小區開別界(방시소구개별계) 시내 곁 작은 거처에 특별한 세상을 열었다.
灑然相得主人情(쇄연상득주인정) 세속에 물들지 않은 주인의 마음을 덩달아 얻었네.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작고 소박한 백운암과 아담한 연못 그리고 영모사를 보노라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담장 너머 저 아래쪽으로는 버거운 삶을 지탱해온 서민들의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여기 와서 자취를 확인하니 비로소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품어 안았던 실학자 백운 고시완 선생의 생각과 세계관의 일부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기와굴뚝
◇백운 고시완 선생은 누구인가
선생의 자는 문언, 호는 백운암으로 본관은 제주다. 선생은 제주 고씨인 고대관을 아버지로, 해주 오씨를 어머니로 하여 정조 7년(1783) 2월 22일에 태어났다. 형 시양과는 어릴 적부터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면학에도 함께 열중하여 형제가 나란히 학문으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백운 선생은 두뇌가 명석하고 성품은 호방하지만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뿐 출세에는 별로 마음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실학 연구에 절차탁마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깊이 탐구하고 우주의 생성관과 이와 기의 흐름을 밝히는 데 몰두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실학자이면서도 동시에 도교적 사상관도 가졌을 듯하다.
천암산 기슭에 두어 칸 집을 짓고 강당을 여니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가르침에 있어서 성의를 다하고 재물을 탐하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 특히 당시에는 대부분의 강당에서 양반의 자제만을 가르쳤지만 백운 선생은 가난한 상민이나 천민들의 자제를 차별 없이 받아들여 가르쳤다고 한다. 이 부분은 토함 이지함 선생이나 화담 서경덕 선생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뿐만 아니라 도술을 부렸다는 일화는 많은데 이 역시 토정이나 화담과 유사하다. 하나를 소개하면, 당시 통제영에서 군점식이라는 해상 군함식을 거행했는데 학동들이 그 광경을 보고 싶어 하자 백운 선생은 학동들을 불러 앞뜰의 못 주위에 앉혀 놓으니 못이 겨울처럼 변했고, 못가의 계수나무 잎사귀를 손으로 훑어 못에 뿌리니 잎사귀 하나하나가 전함으로 변하더니 대오를 지어 전투 형태를 취하여 움직이는 것이 일사불란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 공부에 방해가 되고 학동들 공부에 지장이 되자 손 한 번 움직이니 개구리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기록에 의하면, “작은 못 속에서 노니는 고기와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를 즐기면서 때로는 거문고로 산과 바다에 화답하고 혹은 붓을 들어 풍월을 노래하니 그 고아한 자태는 진실로 세속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이러기를 여러 해 하던 어느 날 밤 꿈속에서 대인이 홀연히 나타나 반석에 걸터앉아 웃으면서 이르기를 ‘그 성을 되돌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때 시냇물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면서 깨달으니 이것이 진리대각의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다시 책을 끌어당겨 학문 탐구에 매진하니 고금의 경서 연구에 걸림이 없고 진리의 근원을 밝히는 데에 막힘이 없었다.”
이에 <역대상도해> 상·하권과 <중용성명도>, <몽대인기>, <혹인문답> 등 여러 편을 저술하였고, 수상문과 사실기록문도 여러 편이 있는데, 모두 성리학을 근본으로 한 우주의 본체와 인성을 논한 역작이었다. 평생을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시던 선생이 헌종 7년(1841) 12월 21일 향년 59세로 타계하시니 제자들이 태평동(현 인평동) 국재 언덕에 유택을 마련하고 장례를 치렀다. 선생의 문집이 여러 번 화재를 입어 몇 편밖에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부인은 인동 장씨 동추 지희의 따님인데 선생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강당 뒤 북쪽에 사우를 세워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니, 옛날 향선생이 돌아가시면 사에서 제사 지내던 것을 본뜬 것이다.
지금도 서재의 뜰에는 못과 대나무 등 옛 모습이 일부 남아 있고 유림에서 매년 음력 8월의 하정일에 석채례(釋菜禮)를 모시고 있다.
김홍섭(소설가)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