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수탈 맞선 양산 소작농들, 독립유공자 서훈
[106주년 삼일절] 양산농민조합원 경찰서 습격 10명 ‘건국훈장 애족장’ 등 받아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 96명 중 10명이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에 참여한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은 1932년 3월 16일 소작농으로 구성된 조합원 300여명이 경찰에 붙잡혀 구금된 조합 간부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양산경찰서에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국가보훈부는 오는 1일 제106주년 3·1절을 맞아 이 사건에 참가한 윤수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강만수·안상수·양명호·이계득·이만춘·이희우·임수만·함성관·신영업 선생에게 대통령 표창을 포상한다.

1932년 3월 양산농민조합의 시위사건 당시 양산경찰서 모습./양산시/
양산농민조합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들의 횡포에 맞서 1931년 4월 결성됐다. 이들은 그해 10월 일본·한국인 대지주에게 ‘소작료는 4할, 지세는 지주 부담’ 등 요구안을 담은 통고문을 보내며 소작제도 정상화를 요구했다. 당시 소작료는 8할에 달했다. 하지만 일본 대지주들은 이를 경찰에 신고해 조합 간부들이 경찰 조사를 받는 일들이 이어졌다.
일본 경찰은 양산농민조합이 다음해인 1932년 2월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대회를 열자 행사가 불온하다며 대회를 중단시키고 선전부장 이봉재 등 간부 16명을 붙잡아 양산경찰서에 가뒀다.
대부분 간부들이 붙잡히자 3월 16일 오전 9시 30분 농민 조합원과 구류된 가족 등 총 300여명이 양산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 도착한 이들은 정문과 뒷문에서 함성을 지르고 돌을 던지며 석방을 요구했다. 일부는 경찰서에 진입해 기물을 파손하고 일본 경찰과 대치했다.

1932년 3월 18일 양산농민조합의 시위사건을 보도한 부산일보 기사./양산시/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이 쏜 실탄에 농민 윤복이와 이만줄 등 2명이 숨졌다. 또한 농민 100여명이 부산형무소에 구금됐다. 조합 간부 16명 가운데 절반가량은 10개월에서 2년 이하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양산농민조합 활동은 중단됐다.
시위를 주도했던 전병건 선생과 김외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사망한 윤복이 선생도 이듬해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이와 함께 김장호, 김태근, 정진영, 최달수, 한동선 선생 등이 그동안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올해는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에 참가했지만 그동안 서훈을 받지 못했던 윤수만 선생 등 독립운동가 10명이 새롭게 서훈을 받게 됐다.
박정수 양산항일독립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경찰서를 습격한 양산농민조합 시위 사건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양산에서는 이 독립운동을 조명하기 위한 활동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10명이 한꺼번에 서훈됨에 따라 지역 역사가 다시금 재조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용락 기자 rock@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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